"어머니는 운전할 때면 목청 높여 노래하곤 했습니다. 어린 나는 그걸 보면서 행복하고 또 괜히 슬펐어요. 어른이 돼서야 이유를 알았죠. 산티아고를 여행할 때 어떤 여자가 운전을 하면서 혼자 크게 노래 부르는 걸 봤거든요. 그 여자는 맘속 깊은 얘기를 노래로 토해내고 있었던 겁니다." 전화기 너머 세바스티안 렐리오(44·작은 사진) 감독 목소리가 안개처럼 축축했다.

지난달 말 개봉한 렐리오 감독의 칠레 영화 '판타스틱 우먼'은 낮엔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고 밤엔 재즈바에서 노래하는 트랜스젠더 마리나(다니엘라 베가)의 얘기다. 마리나의 연인 올란도가 갑자기 숨지자 주변 사람들은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마리나를 의심한다. 작년 베를린영화제 최우수 장편영화상과 올해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받았다. 주연배우 베가는 실제 트랜스젠더다. 렐리오 감독은 최근 전화 인터뷰에서 "처음부터 다니엘라를 주연으로 캐스팅할 생각은 없었다. 영화 자문을 하고 에피소드를 완성하기 위한 인터뷰를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다니엘라와 마주 앉자마자 '아니, 완벽한 배우가 여기 있잖아!' 하고 속으로 외쳤다"고 말했다.

영화는 고통을 희망으로 바꾸는 과정을 그린다. 마리나는 사람들에게 줄곧 괴롭힘당하지만 분노하는 대신 노래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마리나가 부르는 오페라를 듣는 건 밤하늘 별이 찬찬히 떠오르는 것을 숨죽이며 지켜보는 것과 비슷하다. 렐리오 감독은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에서도 여자는 희망 한 조각을 찾아낼 줄 안다. 마리나의 노래는 그런 몸짓 중 하나"라고 했다.

트랜스젠더 가수인 마리나(오른쪽)는 연인 올란도와 이구아수폭포 여행을 꿈꾸지만 올란도는 곧 허무하게 세상을 뜬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렐리오 감독은 두 살 때 칠레로 이주했고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여러 도시를 옮겨 다녔다. 한 도시에서 2년 이상 살아본 적이 없었을 만큼 자주 이사를 다녔지만 유년 시절은 비교적 풍요로웠다. 조부모는 의사였고 그들 집엔 언제나 도서관보다 많은 책이 있었다. 렐리오 감독은 "남들이 돈벌이 되는 일을 하라고 할 때 조부모님은 '예술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셨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재혼하고 나선 새아버지 이름을 따서 성을 '캄포스'로 바꿨으나 훗날 감독이 된 뒤 원래 성인 렐리오를 되찾았다. 그는 "칠레에선 아직도 여자들을 결혼해서 아이 낳는 존재 정도로 여긴다. 내 영화가 그들을 위한 목소리가 되고 또 쉬어가는 그늘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글로리아' '디서비디언스' 같은 영화에서도 그는 여성 얘기를 했다. 그래서 그를 스페인의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과 비교하는 이들도 있다. 렐리오 감독은 "기분 좋은 말"이라고 했다. "알모도바르는 지치지 않고 여성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나 역시 지치지 않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