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에서 자유로… 통로를 놓아주고 싶었다"

조선일보
  • 변희원 기자
    입력 2018.05.02 03:00

    '빛의 예술가' 이반 나바로… 피노체트 치하 삶 녹인 작품展
    굴 속으로 빨려들어갈 듯한 착시 "이 통로 끝에서 자유 꿈꿀 수 있길"

    칠레 산티아고에서 나고 자란 이반 나바로(46)는 어렸을 때부터 어둠이 무섭지 않았다. 1970~80년대에 그의 집은 툭하면 정전(停電)이었다.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1915~2006)가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게 하려고 밤에 전기를 끊었다. 피노체트가 전기를 끊지 않은 날이면 시위대가 발전소나 전기 시설을 공격했다. 나바로의 가족은 전기가 끊기면 라디오와 플래시부터 찾았다. 그는 "정전을 대비해서 군인처럼 질서 정연한 생활을 하게 됐다"며 "피노체트는 빛과 어둠으로 대중을 통제했다"고 말했다.

    1997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 나바로가 '자유'를 만끽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빛'이다. 이때부터 그의 작품에서 빛은 빠진 적이 없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4년 만에 선보이는 개인전 'The Moon In the Water(물속에 비친 달)'에도 불이 다 꺼진 갤러리에서 나바로의 작품 14점만이 형형하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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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Webeatme’앞에 서 있는 이반 나바로. 드럼 안에 일반 거울과 일방투시거울, 네온 조명을 설치해 만든 작품이다. 끝을 알 수 없는 터널을 들여다보는 것 같지만, 실제 작품의 깊이는 60㎝에 불과하다. /고운호 기자
    '네온 아트의 떠오르는 별'로 주목받은 그는 2009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칠레관 대표 작가로 참여했다.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런던 사치컬렉션, 파리 국립현대미술컬렉션 등 세계 주요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했다. 뉴욕타임스는 빛으로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나바로를 가리켜 "선동가"라고 표현하면서 "미술계에 잽을 날리는 아티스트"라고 했다.

    나바로의 작품을 보면 물에 비친 달의 환영(幻影)을 쫓다가 물에 빠진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이 떠오른다. 벽이나 바닥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통로나 구멍이 뚫려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빨려 들어갈 것 같다' 혹은 '걸어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다. 이는 60㎝ 두께의 설치물 안에서 거울과 빛으로 만들어낸 착시다. 일반 거울과 일방투시거울(앞에서 보면 거울 같지만 반대 방향에서 보면 유리처럼 투명하게 보이는 거울)을 마주 보게 한 다음 그사이에 얇은 조명을 끼워 만든다. 두 거울에 빛이 반사돼 상이 무한히 맺히면서 깊은 공간감이 표현된다. "물에 비친 달은 제가 추구하는 이미지입니다. 어둠이 어떤 물체로 인해 자연스레 밝아지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달이 물속에 있는 듯한 시각적 환영이 제게 큰 영감을 줍니다."

    음악을 좋아해서 음반 회사까지 차린 나바로는 이번 전시에 드럼을 내놨다. 연주를 할 수 없는, 소리가 나지 않는 드럼이다. 원통형 드럼 안에도 거울과 조명을 설치했고, 조명은 'BOMB' 'BEAT' 글자 모양이다. 메아리를 빛으로 형상화한 것처럼 이 글자들이 드럼 안에서 끝없이 이어진다. 그는 "어렸을 때는 무슨 음악을 듣는지도 말하면 안 될 정도로 억압된 환경에서 자랐다"며 "소리를 낼 수 없는 상황에서 소리의 파동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작품을 자세히 보고 나면 속았다는 기분이 든다"고 하자, 그는 "작가이지만, 나 자신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이런 작품을 만든다"며 웃었다. "독재 정권 아래에 있지 않아도 우리는 자유롭지 않을 때가 많아요. 예컨대 사람들로 하여금 벽을 바라보게 만드는 갤러리와 미술관도 억압적인 공간이죠. 하지만 저에겐 다른 작가들처럼 벽을 뚫거나 부숴 버릴 용기가 없어요. 대신 지금 현실을 벗어나 다른 공간으로 건너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겁니다. 그곳에선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6월 3일까지. (02)2287-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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