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가두방송 차명숙씨 "고문진상 밝히라"

입력 2018.04.30 13:43 | 수정 2018.04.30 13:55

권경안 기자 1980년 5월 당시 광주시내에서 가두방송을 했던 차명숙씨는 "보안대와 광주교도소에서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며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광주교도소 고문 진상규명·처벌 요구
국가기록원 보존 교도소 기록 공개
광주광역시=권경안 기자

“가슴 속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을 모두 털어놓으라는 두 아들의 얘기를 듣고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내에서 가두방송을 했던 차명숙(57)씨는 30일 오전 광주시의회 브리핑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38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기억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수감기록으로 증거가 명백하게 남아 있는 광주교도에서의 고문수사와 잔혹행위를 고발한다”고 밝혔다.

경북 안동에서 28년째 살고 있는 차씨는 계엄법위반 등으로 징역10년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던 1981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이후 광주를 떠나 살아왔다.

“특히 잔인한 고문수사의 기억이 여전히 제 몸에서 떠나니 않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고문을 받았던 광주시민들 모두가 겪는 고통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진히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구요. 가해자는 처발받지 않았습니다.”

차씨는 “1980년 5월 19일 계엄군의 무자비한 만행을 광주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가두방송을 시작했다가, 21일 전남도청앞 계엄군의 집단발포 이후 병원에서 부상자를 돌보던 중 기관원들에게 붙잡혀 505보안대 지하로 끌려갔다”며 “보안대와 (광주)상무대 영창에서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여성들에게 가해진 고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치욕이었다”며 “이제라도 5·18진상조사위는 80년 5월에 자행된 고문수사와 잔혹행위에 대한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고 관련자를 처벌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보안대와 상무대 영창에서 받은 고문으로 하얀 속옷이 까만 잉크색으로 변하도록 살이 터져 피가 흘러나와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다”며 “비참한 모습으로 엎드려 생활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1980년 9월 16일 광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광주교도소에서 2차고문을 받았다. 이미 정해진 7가지 항목에 죄목이 추가되면 사형이나 종신형까지 받을 수 있으니 자신들이 하라는 대로 시인하라고 수사관들이 협박했다고 그는 말했다.

차씨는 이에 대해 “광주교도소에서 일주일동안 끔찍한 고문수사를 받은 후, 자살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하에 80년 10월 2일부터 31일까지 혁시갑을 한 채 징벌방에 보내졌다”며 “30일 동안 징벌방에서 폭 10㎝, 두께 3㎝의 혁띠를 차고, 쇠줄(혁띠)에 묶여 있는 가죽수갑을 양쪽 손목에 찬 채 먹고 자고 볼일까지 보면서 짐승만도 못한 상태로 지내야 했다”고 말했다.

차씨는 지난 2011년 재심청구때 국가기록원에서 찾은 광주교도소 수감기록을 이날 공개했다. 이 기록에는 차씨의 ‘불온언사발언’이 기록돼 있었다. ‘광주사태 당시에 유언비어를 날포한 혐의로 재판계류중에 있는 자로서 개전의 정 없이 불온언사를 발언하였음으로, 재소자 징벌규정에 의거 처벌한다’며 ‘자살미연방지를 위해 혁시갑하고 동정을 엄밀히 시찰코자 한다’고 적혀 있다. 차씨는 그러나 “발언했다고 나온 내용은 내가 알지도 못하는 내용들”이라고 말했다.

이 문서에 조사교위, 당직교위, 보안과장, 부소장, 소장 등 관련자, 책임자들이 적혀 있다. 차씨는 “광주교도소는 지금이라도 당시 자행한 고문수사와 가혹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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