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연금 줄여… 그리스 8월 구제금융 8년만에 졸업

입력 2018.04.30 03:07

[살아나는 그리스]
공무원 23만명 줄이고 연금 수령액 최대 44% 깎아

파리=손진석 특파원
파리=손진석 특파원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가 지난달 그리스 아테네에 R&D(연구·개발) 센터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의외라는 반응이 나왔다. 테슬라는 유럽에서 영국, 독일, 네덜란드 외에 투자한 나라가 없었다. 네 번째 투자처로 8년째 구제금융에 의지하는 그리스를 고르자 의아하다는 말이 나올 법했다. 하지만 테슬라는 "그리스는 전기모터 기술이 축적된 나라"라며 "유럽 남서부 거점으로 삼기로 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돈 냄새' 잘 맡는 머스크의 이런 결정은 그리스 경제에 다시 볕 뜰 날이 다가왔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테슬라뿐 아니다. 글로벌 큰손들이 속속 그리스에 들어가고 있다. 네덜란드계 대형 유통 체인 스파(Spar)가 이달 들어 크레타섬에 수퍼마켓을 열었다. 이를 시작으로 스파는 그리스 전역에 수퍼마켓 350개를 신설할 예정이다.

◇오는 8월, 8년 만에 구제금융 졸업

퍼주기식 복지제도 확대, 공공 부문 비대화로 나라 살림이 망가지던 중 글로벌 금융 위기를 만나 좌초했던 그리스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연금 개혁, 공무원 축소를 앞세운 허리띠 졸라매기가 효과를 보며 서서히 정상 궤도로 돌아오고 있다.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1.4%를 기록한 데 이어 올해 2%(IMF 전망치) 성장하며 순항할 예정이다. 2008년부터 2016년 사이 2014년만 제외하고 쭉 마이너스 성장이 이어졌고, 재정 위기가 극에 달한 2011년 성장률이 -9.1%였던 것과 비교하면 상전벽해다.

무엇보다 오는 8월 구제금융 체제를 졸업하게 된다. 그리스는 2010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EU와 IMF로부터 3260억유로(약 428조원)를 빌려와 연명해 왔다. 하지만 8월부터는 구제금융에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인 나라 살림을 꾸리게 될 전망이다.

그리스 경제성장률 추이 외
지난 19일 마리우 센테노 유로그룹(유로존 재무장관 협의체) 의장은 "8월에 그리스의 3차 구제금융 프로그램이 끝나면 더 이상 연장하지 않는다"고 공식 선언했다. 그리스의 지난해 재정 흑자가 경제 규모(GDP)의 4%에 달할 정도로 튼튼해졌으니 자력 갱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투자 늘어나고 국가 신용등급 일제히 상승

요즘 그리스 전역에서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잃어버린 10년'에서 탈피하며 본격적인 온기가 돌고 있다. 그리스 최대 항공사인 에게항공은 지난달 여객기 42대를 에어버스사에 주문했다. 40억유로(약 5조2600억원) 규모로, 최근 10년 사이 그리스 기업의 투자로는 최대 규모다.

온라인 생활용품 업체를 운영하는 알렉스 레우시스씨는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서 "2015년 대비 매출이 150% 올랐다"며 "이대로 가면 직원을 두 배로 늘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아테네 중심가에서 문 닫았던 상점들도 속속 다시 문을 열고 있다. 김두식 코트라 아테네무역관장은 "아테네 시내에서 짓다 중단한 건물과 주택을 다시 짓고 있고, 호텔들이 인테리어 공사를 활발하게 진행하면서 경기 회복 조짐을 체감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25일 그리스 아테네 시민들이 정부의 연금 삭감 조치에 반대하며 거리로 뛰쳐나와 항의하고 있다.
지난 25일 그리스 아테네 시민들이 정부의 연금 삭감 조치에 반대하며 거리로 뛰쳐나와 항의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해외에서 그리스를 보는 눈도 달라지고 있다. 3대 국제 신용평가사가 모두 올 들어 그리스의 신용등급을 상향 조정했다. 무디스가 Caa2에서 B3로 올렸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와 피치는 나란히 B-에서 B로 올렸다. 지난 2월 그리스는 8년 만에 7년 만기 국채 발행에 성공하며 해외 투자 유치에도 자신감을 갖게 됐다. 금리 3.75%에 30억유로(약 3조9400억원) 분량을 발행할 예정이었는데, 사전 신청 때 목표치의 2배가 넘는 65억유로가 몰려 예상보다 좋은 조건인 3.5% 금리로 발행했다.

공무원 줄이고 연금 대폭 깎아

그리스가 회생한 비결은 혹독할 정도로 긴축 정책을 실시한 데 있다. 2012년부터 '밑 빠진 독'으로 재정을 갉아먹었던 연금제도를 뜯어고쳤다. 우선 연금 수령액을 깎았다. 700유로(약 92만원)를 받는 사람은 14%를 깎았고, 3500유로(약 460만원)를 받으면 무려 44%를 삭감했다. 연금 받을 수 있는 나이도 65세에서 67세로 올렸다.

비대한 공공 부문을 줄이기 위한 구조조정도 함께 이뤄졌다. 인력 규모는 26%, 임금은 38% 줄였다. 2009년에는 공무원이 90만명에 달했지만 2016년에는 67만명까지 줄었다. 퇴직하는 공무원들을 대체하는 신입 공무원 채용을 자제해 월급으로 나가는 비용을 줄인 것이다. 공무원의 평균 연봉은 2009년 2만5866유로(약 3400만원)였지만 2016년에는 1만6018유로(약 2100만원)까지 줄어들었다.

나가는 돈을 줄이는 동시에 세금을 인상해 들어오는 돈을 늘렸다. 부가가치세를 2013년 19%, 2016년 24%로 순차적으로 올렸다. 2016년에는 법인세율도 26%에서 29%로 인상했다. 국내 상황이 호전되자 해외로 떠났던 젊은이들도 속속 귀국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일하던 영양사 나탈리아 니콜라이디(29)는 "임금이 다소 줄어들지만 그리스에서 일할 기회가 늘어나고 있어 희망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서 말했다.

제조업 기반 없어 빠른 회복은 기대 어려워

그러나 그리스가 완전한 정상 궤도로 돌아오려면 상당한 시일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오는 8월 구제금융 졸업은 더는 IMF나 EU에서 돈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일 뿐이며, 최근 8년간 빌려온 3260억유로(약 428조원)의 구제금융을 장기간에 걸쳐 갚는 절차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채권단의 감시를 받으며 허리띠를 졸라매는 긴축 정책을 계속 이어갈 수밖에 없다. 강준모 주(駐)그리스 한국대사관 재경관은 "구제금융을 받지 않게 된다는 것은 회생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긍정적 신호이지만 이제는 그리스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는 점에서 단기 불안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리스의 치명적인 약점은 제조업 기반이 약하다는 것이다. GDP에서 제조업 비중이 5% 남짓에 그친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외환 위기 직후 제조업 수출을 크게 늘려 4년 만에 구제금융을 전액 상환하는 저력을 보여준 것과 비슷한 기적을 기대할 수 없다. 회생하려면 정부 지출을 줄이는 것을 유지하는 데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스 국민들의 고통은 쉽게 멈출 수 없는 상황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그리스 정부가 최대한 유리한 구제금융 상환 조건을 얻어내기 위해 지속적인 재정 개혁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항구·공항 팔아… 그리스, 빚 갚았다 파리=손진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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