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2월, 토지공개념연구위원회는 부동산 정책에 대한 여론 향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상위 5% 계층이 전체 사유지의 65%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무부 전산 자료로 토지 소유 편중도를 분석한 결과였다.

실제로 3저 호황(저유가·저금리·저달러)의 끝물에 접어든 1988년부터 부동산 투기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재벌과 부유층은 여유 자금을 총동원해 수도권 일대의 땅을 사 모았고, 중산층 내 상위 그룹은 다주택 보유 전략을 실행에 옮겼다. 지방 유지들 역시 자녀 세대의 서울 안착을 돕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였다. 1970년대 후반에 부동산 열풍을 경험한 그들 대다수는 고성장의 과실이 부동산 보유량에 따라 불평등하게 분배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특히 전두환 정권 후반기 유동성 급증과 주택 공급 부족은 이런 전망을 더욱 부채질했다.

1992년 항공기에서 내려다본 경기도 고양시 일산 지역. 아파트 건설이 한창이다. 노태우 정부는 체제 안정을 위해 신도시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건설부 토지국장이었던 1947년생 L씨는 부동산 대책 마련을 위해 토지공개념위원회 운영을 지원하며 토지공개념의 법적 제도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는 정책 홍보를 위해 자주 언론 인터뷰에 나섰는데, 그때마다 지금 정부가 부동산 시장에 개입하지 않으면 중산층이 붕괴하고 말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말한 중산층 붕괴란 사실상 중산층 진입을 위한 주거 사다리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일차적 피해 대상은 아직 '내 집'을 마련하지 못한 30대 예비 중산층이었다. 6월 항쟁 넥타이 부대의 주축이기도 했던 이들의 절망감은 무주택 계층 전반으로 급속히 확산될 공산이 높았다.

36.6%의 지지율로 집권한 노태우 정권에 이 사실은 무척 중요했다. L국장을 지원하던 문희갑 경제수석과 이진설 건설부 차관도 이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양자 모두 1980년대 초반 김재익 수석의 물가안정시책을 보좌하던 경제기획원 출신 관료였다. 그들이 보기에 땅값·집값 폭등은 노동쟁의보다 더 심각한 체제 불안 요인이었다. 수요 억제와 공급 확대, 양 측면에서 토지공개념 도입과 수도권 신도시 건설은 이 위험 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최선의 해결책이었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체제의 취약점을 원천적으로 보강하는 방편'이었다.

물론 보수층의 반발도 없지 않았다. 토지공개념이 문제였다. 당시 여당 대표위원은 토지공개념 도입이 혁명을 억제하기는커녕 오히려 '혁명적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그는 김영삼 정권 시기, 잠실 일대에 소형 연립주택 11동 75가구를 아들 명의로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국회의장직을 사퇴하게 될 인물이었다.

한편, 개혁 관료로 주목받으며 탄탄대로를 걷는 듯 보였던 L국장의 행보가 궤도에서 이탈한 것은 1991년이었다. 한보그룹의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에 연루되어 사법 처리된 것이다. 관가에는 한보 회장의 돈을 받은 공무원이 한둘이 아닐 텐데 검찰이 구색 맞추기 용으로 끼워 넣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L국장이 재기한 것은 그로부터 4년 후였다. 이건희 회장의 적극적인 엘리트 관료 영입 전략의 결과로, 삼성경제연구소 부소장으로 발탁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