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입력 2018.04.26 19:00 | 수정 2018.04.26 21:14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남북한 정상 회담을 코앞에 두고 온 나라가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매체들은 마치 남북 간에 평화통일이 이미 기정사실이 된 듯 호들갑을 떨고 있다. 북한의 수령 김정은이 우리 군을 사열한다니 생각 없는 사람들은 북한으로 관광 갈 꿈에 부풀어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드디어 나라가 망하는구나 하며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터져 나온다.

    나라 없는 백성의 서러움 속에서 자라났던 세대들은 일제에 대한 연합군의 승전으로 우리가 해방되는 환희를 잠시 맛보았지만 그것이 우리 민족이 고대하던 광복, 곧 자주독립이 아니라 서로 이념을 달리하는 두 강대국 미국과 소련군에 의한 남북한 분할점령임을 알고 크게 당황했다. 스탈린의 세계 공산주의 제국 건설의 야욕에 맞서 악전고투한 끝에 1948년에는 자유민주주의를 기치로 하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수립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적어도 38선 이남의 동포들이나마 독립국가의 국민으로 세계인의 인정을 받는 꿈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38선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고 운명이 갈린 동포들과 다시 통합한다는 꿈이 여물기도 전에 1950년 6월 25일 공산주의 북한 인민군의 기습공격으로 신생 대한민국의 운명은 위태로워졌다. 수백만의 인명 피해와 이산가족이 발생하며 한반도 전체가 초토화되다시피 한 재앙을 낳은 뒤에야 전쟁은 뚜렷한 승부수 없이 정전협정으로 종식되었다. 미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의 신속한 참전 결정이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은 그때 사라졌을 것이며 눈앞에 어른거리던 북진통일의 꿈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다.

    나라가 부강해진 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나라가 중요하고 고마운 줄을 모르고 나라를 만들고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모르는 6·25 이후 세대들은 ‘민주화’의 구호에 사로잡혀 건국, 호국, 부국의 과업이 선행 또는 병행되지 않으면 ‘민주화’나 ‘인권’ 등의 구호에 현실적 의미가 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소련을 비롯한 유럽 공산권의 붕괴로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승리가 확실해지고 우리도 드디어 정권 교체에 성공하자 ‘민주화’와 ‘인권’ 등의 구호는 어느새 ‘민족, 민중’과 ‘민족끼리’와 ‘평화통일’의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북한에 대한 우리의 흡수통일 가능성이 점쳐지던 199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의 동정 어린 지원의 대상이었던 북한이 우리의 ‘햇볕정책’ 채택 이후부터 핵보유국으로 변신하면서 급기야 미국의 안보까지 위협하는 상황이 되자, 특히 대통령의 권력 남용을 차단해야 한다는 명분의 ‘촛불 혁명’으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후로는, ‘평화’라는 구호가 ‘민주화’나 ‘인권’ 등 모든 다른 구호를 압도하는 가치처럼 되어버렸다. 대통령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는 반드시 지킬 것”이라는 약속을 반복했다. 북핵의 위협 제거에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서 정작 가장 큰 희생자가 될 우리나라에서는 평화통일 이야기가 꽃을 피웠다. 남북 정상회담이 드디어 성사되기에 이르는 데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기 때문에 나라 없는 설움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사람들은 김정은을 만나러 가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고 한반도에서 평화를 정착시키도록 설득하기 위해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이 내놓을 수 있는, 또는 내놓으려고 하는 카드는 무엇입니까?” 라고...

    문재인 대통령의 정치적 수완의 특징을 들자면, 너무도 자명해서 다른 사람들은 아예 이야기조차 하지 않는 것을 거듭 강조함으로써 대중의 열광적 지지를 얻고 머리 아프게 하는 현실적 방법론 논의는 교묘하게 피해 가는 재주에 있는 것 아닌가 한다.

    평화를 원치 않는 사람이나 나라는 세상에 없다. 문제는 평화를 지키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가다. 핵무기를 포함한 값비싼 무기를 개발하고 축적하는 목적은 바로 평화와 자기들의 이해관계를 침범당하지 않기 위함이고 평화보다 더 중요한 어떤 가치들, 예컨대 자유나 독립 등이 위협받을 때 남의 노예로 살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전쟁까지도 불사하는 것이다. 전쟁에는 제국주의 전쟁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약소민족들의 애국·애족의 숭고한 전쟁이 있다는 것을 약소민족의 설움을 겪을 만큼 겪은 우리가 모를 수 없다.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목마르게 외치며 죽어간 선열들의 모습을 상기해보자.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김정은은 온 세계가 분노하는 온갖 반인륜적인 악행의 주인공이라는 것은 천하에 드러난 사실이지 결코 소수의 의견이나 비밀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단지 핵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시진핑으로부터 우리 문재인 대통령은 못 받았던 최고의 영접을 받았고 드디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까지 직접 대면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지금 한껏 오만에 부풀어 있을 김정은이 우리 대한민국 대통령을 트럼프 대통령에 앞서 만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문재인 대통령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경제 발전을 위한 지원이 목표라면 우리보다 미국이나 일본으로부터 얻을 것이 훨씬 더 많고 그 면에서 지금 우리는 전보다 훨씬 더 불리한 위치에 있다. 북한이 우리에게서 바라는 것은 분명 남북한 간 평화 관계 수립과 궁극적인 통일일 터인데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남북 어느 쪽의 가치와 주도권 아래서 어떤 조건으로 그것이 이루어지고 통일 후 우리의 삶은 실제로 어떻게 달라질까 하는 것이다. 우리 국민이 지금과 같이 안락하게 살면서 북한 사람들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고 그들의 쇼나 구경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는 말도록 국민을 일깨워야 하지 않는가?

    핵 개발 이전부터도 남북관계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이제 북한이 ‘핵무기’라는 칼자루까지 쥐고 있는 마당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통일 방안으로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지금의 대한민국과 사이비 공산주의 김씨 왕조 3대 세습체제의 북한 간에 절충이 가능하다고 문재인 대통령은 믿는가? 새끼 돼지 3형제의 동화에서처럼, 남한과 북한은 같은 조상에게서 나온 형제의 정치체제였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걷는 사이 남쪽의 형은 부자가 되고 북쪽의 아우는 가난뱅이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북쪽의 아우는 자식들이 허기에 시달리는 것도 불사하고 비싼 무기를 구입한 후 남쪽의 형 보고 형제가 반목하지 말고 울타리를 터놓고 평화롭게 함께 살자고 제의한다. 그 비싼 무기를 배부른 돼지 같은 조카들이 도둑질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데 사용하려 할 것인가 아니면 가진 것을 다 내놓으라고 조카들을 협박해서 빼앗은 것으로 굶주렸던 자기 자식들부터 먹여 살리려 할 것인가?

    설사 남북 간에 평화협정이 이루어진다 하자. 북한이 가장 먼저 요구할 것은 미군 철수일 것이다. 그들이 철수한 다음에 북한이 다시 핵무기를 꺼내 든다면, 우리는 어찌할 것인가? 그때쯤 되면 “우리 민족끼리 평화통일을 하면 다 끝나는 일인데 북한에 맞서 전쟁을 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라고 안일함에 빠져 사는 데 익숙한 절대 다수의 대한민국 국민이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핵은 말할 것도 없고 재래식 전투력만으로도 미군의 지원 없이는 우리 혼자서 북한과의 전쟁을 감당해낼 수 있을지 자신할 수도 없는데 평화적 대안을 제시하는 북한과 굳이 전쟁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주장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더구나 무슨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라도 평화는 지키겠다고 문재인 대통령은 누누이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대한민국은 이처럼 쉽게 평화지상주의자들의 꾀임에 넘어가 하루아침에 북한에게 제물로 바쳐질 수 있을 것이다.

    김정은은 핵 포기 의사는 없고 핵보유국으로서 이미 실험을 끝마친 상태이니 더 이상의 실험은 필요 없고 쓸모없게 된 실험시설은 폐기할 용의가 있음을 분명히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우리 매체들은 마치 북한이 핵을 폐기하기 시작이나 한 듯 우리의 대북 방어장치 제거를 대거 환영하는 작태를 보인다. 판문점에서 벌어질 희대의 역사적 ‘쇼’에 앞서 적극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얄팍한 계산 때문일 것이다

    가장 낙관적인 시나리오를 생각해서 남북간에 평화 관계가 당분간 지속된다고 가정하자. 지금 남북 간의 경제수준의 차이는 엄청난데 누가 어떻게 그 차이를 메꿀 것인가? 지금 한·일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악화되어 있고 남북 간 평화 관계 수립은 분명 한미동맹의 파기를 조건으로 할 터인데 미국과 일본의 적극적 지원 없이 북한의 굶주린 동포를 먹여 살릴 힘을 우리 스스로가 지금 가지고 있는가? 체제의 지각변동을 각오해야 하는 남북한 간의 만남과 합의는 우리가 그 변화를 주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칠 때 시도할 일이지, 지금처럼 국론은 심히 분열되고 경제지수는 나빠지고 있으며 대외관계도 지극히 저조할 때는 아닌 것 아닌지 묻고 싶다.

    불행히도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운명은 우리만의 힘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북한이 핵 무기 개발을 고집할 때 그것은 미국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1945년 이래 북한의 일관되고 공개적인 목표였던 미군철수라는 목표를 달성하고 남북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전략임을 역사나 정치에 조금이라도 책임 있는 견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평화통일을 향한 염원이 환상을 낳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그 사실이 간과되었을 뿐이다. 지금도 남북 관계 변화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전개될지에 관한 궁극적인 열쇠는 미국이 쥐고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는 독자적인 힘이 없는 문재인 대통령도 자기가 주장하듯이 운전자의 역할을 하지는 못할망정 김정은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하는가에 따라 우리 대한민국 국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되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치명적인 장애가 될 수도 있다. 핵에 관한 이야기는 두 정상에게 맡겨 놓은 채로 남북간 ‘합의’ 형식부터 준비해 놓은 듯한 지금의 상태는 우리 국민을 심히 불안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친일’ 하면 치를 떠는 듯한 것이 문재인 대통령 지지세력이고 이완용은 매국노의 표상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것이 이완용도 젊은 시절에는 탁월한 능력을 갖춘 애국인사였고 그가 친일의 길을 선택한 것은 불가항력적인 일본의 힘 앞에서 민족의 힘을 보전하는 길이 무력 항거보다는 유리한 타협이라는 자기 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점이다. 몇 주 전엔가 영국의 어느 유력 언론인은 문재인 대통령이 외교의 천재이거나 아니면 대한민국을 파괴하는 공산주의자가 아닌가 의심된다는 논평을 한 일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 기로에 서 있다. 대한민국이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이완용이 되느냐 아니면 핵을 가진 김정은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평화통일의 길로 이끌어 내는 기적을 이룩하는가 하는 것이다. 전자는 피하고 싶고 후자는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현상에 큰 변화가 없도록 하는 소극적인 자세라도 유지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핵 폐기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남북한 간 평화 협정이라도 거론한다면 그것은 온 세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대한민국이 정치적 자살을 하는 역사적 ‘쇼’ 케이스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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