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南北회담 수백 번 했지만… 이산가족상봉 빼고는 무슨 효과 있었나"

조선일보
  •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18.04.23 03:00

    ['남북회담의 가장 오래된 證人' 이동복 선생]

    "별 한 개 단 정치군인 김영철, 남북회담 첫 등장때 건방져…
    우리가 '비핵화' 의제 꺼내자 北 '조선반도 비핵지대' 응수"

    "대화를 통해 이뤄지게 하는 것도 成果이지만
    안 이뤄져야 할 것은 안 이뤄지는 것도 성과"

    이동복(81)씨는 남북회담의 '가장 오래된 증인(證人)'이다. 박정희 시절 '7·4 남북공동성명', 노태우 시절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는 "남북회담을 그동안 수백 번 했지만 이산가족 상봉을 빼고는 실질적으로 무슨 효과가 있었나"라고 말했다.

    ―김정은이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를 중단하고 풍계리 핵 시험장을 폐기하겠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주 좋은 일"이라고 환영했다. 획기적인 진전이 이뤄질까?

    "이런 선언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사찰(査察) 단계에서 한 번도 지켜진 적 없다. 풍계리 핵 시험장은 지하 갱도의 붕괴로 더 이상 못 쓰는 것이다. 2008년 영변 냉각탑을 파괴했던 효과를 노리는데, 마치 죽은 말고기를 팔아먹는 것 같다."

    ―남북 정상회담에서 종전 선언을 거쳐 평화협정 체결로 가는 구상이 발표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런들 남북한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겠나, 서로 의심이 있는데. 괜히 '헛패'를 쓰는 거다. 아마 북한은 미군 철수와 한·미 동맹 폐기 주장을 들고 나올 거다."

    ―과거와 비교했을 때 북한이 달라진 것 같지 않나?

    "과거 40년 가까운 남북 대화를 했지만 내용 면에선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했다. 북한은 대화를 대화로서 하지 않고 통일전선 공작의 일환으로 해왔다. 내가 보기에 하나도 바뀐 것이 없다."

    이동복씨는 “별 한 개의 정치군인으로 1991년 남북회담에 첫 등장한 김영철은 건방졌다”고 말했다.
    이동복씨는 “별 한 개의 정치군인으로 1991년 남북회담에 첫 등장한 김영철은 건방졌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과거에는 회담 대표로 참여했으면서 지금은 '회담 반대론자'가 된 건가?

    "회담 반대론자라기보다 무용론·회의론자다. 북한의 근본적 변화가 없는 한 사실 회담은 의미가 없다."

    ―전쟁 위기설까지 갔다가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게 된 것은 진전이 아닌가?

    "대북 압박 제제로 북한이 고통을 느끼는 시점에 왔는데 현 정권이 엉뚱한 '운전자론'으로 끼어들어 판을 흩트려 놓았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는 걸 묵인해주고 '위장 평화'로 우리 사회를 속이고 있는 셈이다."

    그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신문기자로 일하다가, 남북 대화가 막 시작되려던 1971년 중앙정보부에 스카우트됐다.

    "남북회담의 환상을 가졌을 뿐, 실제 협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공산주의자와 협상 경험이 있는 미국·서독·대만의 전문가를 초청해 워크숍을 했다. '국가는 어떻게 협상하는가'의 저자인 프레드 찰스 이클레 교수가 그중 한 명이었는데, '원론적인 합의를 해서는 안 된다. 원론의 이행 단계에서 다른 해석을 내놓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와의 협상에서는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없게끔 단어 하나하나에 주의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남북 대결 구도에서 처음으로 '7·4 남북공동성명(1972년)'을 이뤄냈다. 그때 우리 사회에서는 통일 분위기로 들떴는데.

    "북측에서 '자주, 평화, 민족적 대단결의 평화통일 3대 원칙'을 제시했다. 북한의 해석으로 하면 주한 미군과 한·미 동맹, 국가보안법을 깨라는 것이다. 우리 회담 전략반에서는 반대했다. 하지만 이후락 중정부장이 '그걸로 시비하면 남북회담이 진전할 수 없으니 받으라'고 했다. 남북 성과로 '10월 유신'에 대한 반발 여론을 돌리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7·4 공동성명은 그 뒤 남북 관계에서 '족쇄'가 됐다."

    ―'족쇄'가 됐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지난번 정의용 안보실장이 평양 갔을 때도 북한은 '체제 보장'을 요구했다. 이는 7·4 공동성명에서처럼 주한 미군과 한·미 동맹 등 북한에 위협되는 요소가 먼저 제거돼야 한다는 뜻이다."

    ―당시 이후락 중정부장을 수행해 평양에 갔을 때 나온 화동(花童)이 김현희였다는 게 맞나?

    "북한 군용 헬리콥터로 평양 대동강 남쪽의 임시 착륙장에 내리자 노동당 간부와 화동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내게 다가온 화동에게 '꽃이 참 예쁘구나. 꽃 이름이 무엇이지요?'라고 말을 걸자, 그 화동은 몇 발짝 군대식으로 물러나며 '조선 사람이 조선 꽃 이름을 모른다는 말입니까?'라고 쏘아붙였다. 그로부터 15년 뒤 1987년 11월 KAL 858기의 공중 폭파가 있었다. 그 화동이 폭파범 김현희로 밝혀진 거다."

    1979년 그는 중앙정보부에서 퇴직했지만, 노태우 정부 시절 남북 고위급회담이 시작되자 안기부장 특보로 발탁돼 남북 협상에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천안함 주범'으로 알려진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이 당시 북측 대표단으로 나왔는데?

    "그때 별 한 개의 정치군인으로 남북회담에 처음 등장했다. 강경하고 건방졌다. 북한에서는 별 하나를 '소장'이라고 부르는데, 그는 협상 상대인 박용옥 장군을 '박 준장'이라고 불렀다. 그런 호칭으로 자극하는 것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이를 보고받고 박용옥을 소장으로 진급시켰다."

    ―김영철은 어떤 의제에 참여했나?

    "NLL(서해군사분계선)과 관련된 협상이었는데 우리 쪽에 논리적으로 밀렸다. 그때 북한이 NLL을 받아들였다. 남북기본합의서에는 '정전 상태를 평화 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해 계속 대화한다. 남북 경계선은 그동안의 군사분계선과 상호 관할해온 구역으로 한다'로 명시돼 있다."

    ―그때 처음으로 '비핵화'가 회담 의제가 됐지 않나?

    "1991년 10월 미국의 요청으로 남북 고위회담에서 '비핵화' 의제를 꺼냈다. 그 직후 노태우 대통령이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했다. 그러자 북한은 '조선반도의 비핵지대화(Nuclear Free Zone)'라는 안을 들고 나왔다."

    ―'비핵화'와 '비핵지대화'의 차이는 뭔가?

    "핵을 안 가지고 있는 나라가 핵을 갖지 않겠다는 것이 '비핵화'이고, 핵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특정한 지역을 설정해 핵무기 사용하지 않게 하자는 것이 '비핵지대화'다. 북한의 '비핵지대화' 주장은 미국의 핵우산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8시간 논쟁이 붙었다. 결국 북한이 '비핵지대화' 주장을 철회하면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마련됐다."

    ―평양 회담에서 김일성을 직접 만났나?

    "회담이 모두 끝난 뒤 주석궁으로 초대받았다. 만찬 전에 김일성이 단장인 정원식 총리와 나만 따로 불렀다. 김일성은 호주머니에서 '미군 철수와 국가보안법 폐지하라'는 성명서를 꺼내 우리 앞에서 읽었다. 불과 두 시간 전 남북기본합의서를 발효시켰는데 그동안 해온 자기네 주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이듬해 '핵통제 공동위원회'가 구성돼 핵 사찰 규정을 협의하자, 북한은 '비핵지대화' 주장을 다시 꺼내 들었다. 북한과 협상해 공동 선언이나 협정문을 만든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지금 김정은이 비핵화 쇼를 하고 있지만 기본 입장은 과거와 전혀 달라진 게 없다."

    ―김정은은 할아버지 김일성 흉내를 내고 있다. 당시 김일성을 대면해 보니 어떻던가?

    "식사 동안 김일성 뒤에는 두 명의 시종이 있었다. 김일성은 뻣뻣하게 앉아 수저로 음식을 뜨는데 절반이 턱 밑으로 흘러내렸다. 시종이 묻은 음식물을 거둬냈다. 김일성은 맥주를 계속 마셔댔다. 그 모습이 거대한 파충류처럼 보였다. 그의 말도 '남조선에는 자동차가 많지. 매연가스가 문제가 있어, 사람 폐에 구멍이 뚫리지. 우리 공화국에서는 가스 자동차는 안 돼. 전차는 좋지'라는 식으로 제멋대로였다."

    ―그 뒤 소위 '훈령 조작 사건'에 휘말렸다. 남북 총리회담 중 '이인모 송환 문제'와 관련해 본인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청와대 훈령을 조작했다는 것인데?

    "함께 갔던 임동원씨가 '북측 대표가 이인모 송환만 보장해주면 판문점 면회소 설치와 이산가족 서신 교환 문제를 협의할 수 있다고 했다'며 서울에 승인을 건의하는 전문(電文)을 한밤중에 보냈다. 단장인 정원식 총리는 전문 내용을 잘 몰랐다고 한다. 그 뒤 내가 총리의 지시에 따라 '임동원의 전문은 대표단 차원에서는 모르는 개인행동'이라고 서울에 알렸다. 혼선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내부적으로 매듭이 된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듬해 가을 정기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안기부법 개정' 투쟁 과정에서 이를 정치 쟁점화했다. 나는 논란에 휩쓸리는 게 싫어 그해 말 물러났다."

    ―임동원 당시 통일부 차관도 이 문제로 경질됐다. 그 뒤 김대중 정부에서 외교안보수석, 통일부장관, 국정원장, 외교안보통일 특보 등을 거치면서 '햇볕정책'을 입안·집행했다. 현 정부에서는 남북 정상회담 준비자문단장을 맡고 있는데?

    "임동원은 '피스메이커'라는 책에서 그날 밤의 일을 거짓으로 기록했다. 마치 그가 남북 협상을 다 한 것으로 해놓았다. 그는 1990년 남북회담 대변인을 맡았을 때 좋은 평가를 못 받았다. 그래서 이듬해 내가 대변인을 겸하면서 전략회의 사회자를 맡았던 것이다. 그때도 그는 '미국은 제국주의이고 북한은 주체의 나라'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도 경청해 주지 않아 고독했고 불평이 많았다."

    ―노태우 대통령의 임기 말에도 정상회담설이 있었는데?

    "1992년에 그런 분위기가 있었을 때, 서동권 안기부장에게 '상황과 여건이 충족되지 않았는데 정상회담을 하겠다면 나는 빠지겠다'고 말했다. 서 부장이 '너무 촉박하다'며 노 대통령을 설득했다. 1년 뒤 북측 회담 대표인 윤기복이 서울에 내려와 접촉했다. 그는 '김일성 수령님 생신 만찬 자리에 노 대통령이 참석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정상회담인가?'라고 묻자, '그냥 만나면 얘기하게 되겠지'라고 했다. 나는 반대 입장을 냈다. 정상회담을 원했던 노 대통령은 나를 좋지 않게 봤다."

    ―정상회담이 많은 걸 해결해 주는 면이 있지 않나?

    "김대중·노무현 시절에 했지만 무엇을 해결해줬고 무엇이 개선됐나. 특정 시점에 할 필요가 없는 대화는 안 해야 한다. 대화를 통해 이뤄지는 것도 성과이지만, 이뤄지지 않아야 할 것은 안 이뤄지게 하는 것도 성과다."

    남북 정상회담의 기대가 너무 넘쳐날 때 이런 예방주사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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