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손해본 듯 살아야 좋은 인생" 84세 노인의 자존감, 이순재

입력 2018.04.21 06:00 | 수정 2018.04.25 09:36

욕망도 눈치도 질서도 정연한 84세 최고령 배우의 ‘직진’ 인생
58년 서울대 철학과 나와 연기 시작, “철학이나 연기나 막연하긴 마찬가지"
“어른 대접받으려면 위세 부리지 말고 염치와 품격 지켜야"
한때 국회의원 활동도… “정치가 연기보다 어려웠지만, 결국 정적과도 친구 돼"

이순재 가천대 석좌 교수. 위엄은 있으나 위험 요소는 사라진 사랑스럽고 말랑말랑한 84세 노인. 그는 젊은이들에게 40대 이상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비전을 가지라고 조언했다./사진=이태경 기자.
봄날의 대학 교정은 푸르른 청춘들로 시끌벅적했다. 흰머리 휘날리는 노인은 화사한 꽃나무 아래서도 시든 기색이 없었다. ‘꽃보다 아름다운 할배' 주위로 스마트폰을 든 학생들이 몰려왔다. 카메라 플래시와 팝콘 같은 웃음이 동시에 터졌다. 어떤 어른이든 통상 살아온 시간의 무게 때문에 괜스레 송구해서 피하기 마련인데, 젊은이들은 느티나무 아래 그늘을 찾듯 이순재를 따랐다.

이순재를 그가 석좌교수로 있는 성남의 가천대학교에서 만났다. 만남을 청하는 문자를 보내자마자 즉시 전화가 와서 약속을 잡았다. 그가 출연한 모 광고 카피처럼, ‘묻지도 따지도 않는’ 군더더기 없는 상쾌한 만남이었다.

84세 최고령 현역 연기자 이순재가 주연으로 참여한 영화 ‘덕구'는 잔잔한 감동을 전하며 벌써 30만이 넘는 관객이 다녀갔다. 영화 속에서 그는 외국인 며느리가 낳은 두 손주를 키우며 인도네시아 로케이션까지 소화했다. ‘착한 메시지'가 좋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노개런티로 출연했다.

돌아보면 그는 강함을 숨기지도 약함을 전시하지도 않았다. 늙어서 순한 노인이 아니라 늙을수록 싱싱해지는 어른으로, 그 삶의 자국을 선명하게 남기는 우리들의 ‘직진 순재'.

서울대 철학과를 나온 ‘엘리트’ 배우는 62년 연기 세월 동안 빛나는 정상엔 한 번도 오른 적이 없다고 했다. 그 자신, 동아연극상도 대종상도 못 받았지만 ‘인생은 손해 본 듯 살아야 큰 손해를 보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대신 ‘최무룡이니, 박노식이니, 최불암이니' 함께 TV 드라마와 극장 문화를 일궈냈던 당대의 개척자들을 자랑스럽게 추켜세웠다.

늙어서 순한 노인이 아니라 늙을수록 싱싱해지는 어른, 이순재./사진=이태경 기자
-학생들이 마음으로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세요?

“난 강의는 안 해요. 워크숍을 하지. 한 학기 동안 무대에 한 작품을 올려요. 우리는 배역도 제비뽑기를 해요. 내 원칙이 기회균등이거든(웃음). 그러다 보면 잘 하는 사람이 단역을 하고 못 하는 사람이 주역을 할 때도 있어요. 신기한 건 못하는 아이들이 자기 능력을 재발견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거야. 정규 시간은 4시간인데, 이렇게 저녁마다 학교에 나와요. 특이한 연출 같은 거 안 하고 고전이나 원작 중심으로 기본기를 다져주려고 해요. 내가 가르치는 연기의 기본은 화술이에요.”

연필 자국 가득한 대본을 들이민다.

-아서 밀러의 ‘시련'이군요.

“여학생들 숫자가 많을 땐 도르프만의 ‘과부들'을 했어요(웃음). 우리 때는 연극할 때 표준어를 모르면 사전을 펴놓고 장음, 단음을 일일이 찾아가며 공부했거요. 요즘은 현장에서 연출가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만 들으면 쓱 넘어가더라고. 그건 좋지 않아요. 외국에서도 스피치 트레이닝은 주요 과정이거든. 말 훈련만큼 중요한 게 없어요.”

-드라마든 영화든 결국 대사 전달력이 좋은 배우들이 끝까지 살아남더군요.

“과거 후시녹음 시절엔 성우들이 녹음을 해줬어요. 신성일 씨도 청춘스타였지만 경상도 사투리 악센트가 있어서 TV에서 활동을 못 했어. 고 추송웅 씨도 마찬가지였지. 최무룡, 허장강, 황해 선배는 화술의 기본기가 확실해서 동시녹음을 했어요. 나는 요즘 젊은이들한테도 너희들 유행어는 10년 지나면 없어지니 변하지 않는 표준어를 구사하라고 해요.”

-연기하실 때 발성이 짱짱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다 이유가 있었군요.

“우리말의 정형을 아름답게 제대로 구사해야 한다는 게 우리 직종의 의무였죠. 오현경, 이낙훈을 비롯해서 오리지널 TV 드라마 개국 멤버들은 훈련을 제대로 받았어요.”

연극에 관한 학구적인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전쟁 때 대전에 피난 내려와서 고등학생 시절에 연극을 올리셨어요. 그때 배우에 대한 꿈이 시작된 건가요?

“그건 좀 우발적이었어요. 당시 충남여고에서 예술제를 하는데 영어로 한다고 해서, 학교 영어 선생한테 ‘햄릿'을 써보라고 부추겼어요. 나는 피난 와서 대전고등학교 청강생이었는데, 일을 꾸며서 극을 올리는 뒷바라지를 했죠. 그때 같이 했던 후배가 미연방 하원의원 했던 김창준이야(웃음). 전쟁통이지만 천막극장에서 영화도 보고 거기서 아버지 만나 도망도 가고 할 건 다 했어(웃음).”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한 소위 엘리트였는데 연기쪽으로 선회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당시엔 ‘딴따라'라고 무시당하는 분위기였을 텐데요.

“50년대에 좋은 영화를 참 많이 봤어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장 뤽 고다르 같은 거장의 프랑스 누벨 바그 영화, 상업과 예술의 경계에 있던 미국 영화를 접하고 감탄했죠. 로렌스 올리비에가 제작 감독 주연한 ‘햄릿'이나 프랑스의 장 루이 바로 같은 대가의 작품을 보면서 ‘저런 예술이라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로렌스 올리비에는 영국에서 기사 작위까지 받았단 말이지.

내가 1958년에 대학을 졸업했는데, 그때까지도 우리나라는 연극영화를 학문으로 쳐주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끼리라도 한번 해보자, 해서 서울대학교 내에 연극동아리를 만들어서 했죠.”

-철학을 전공했던 게 연기에 도움이 되던가요?

“하하하. 열심히 다녀서 졸업은 했어요. 철학을 열심히 공부했으면 대학교수까지 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거나 이거나 막연하긴 마찬가지야. 실용적인 학문이 아니잖아. 다만 인내력이 필요한 학문이죠. 당시에 우리 학교엔 고형곤 선생을 비롯해서 칸트 헤겔을 다루는 한국철학의 거목들이 다 있었어요. 지도교수에게 들은 말이 여태 잊히지 않아. “4년간 해서 무슨 철학을 알겠느냐. 어려운 책 읽는 연습 했다 생각해라." 맞는 말이에요.”

대화 중에 갑자기 예기치 않은 방문객이 들이닥쳤다. 이순재가 중랑구에서 국회의원 하던 시절의 경쟁자, 이름하여 ‘정적'이었던 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이었다. 이순재는 13대 선거에서는 이상수 의원(평민당)에게 700표 차로 패했고, 1992년 3,800표 차로 이겨 14대 국회의원(민정당)으로 정치 활동을 했다.

“내 철학이 뭔가 하면 말이지요. 정치도 마음을 열고 소통하면 적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나는 보수 쪽이고 저 친구는 진보라 정치적으로는 달라도 인간적으론 친구가 됐어요(웃음). 당적을 떠나서 돕는다니까.”

“내 철학이 뭔가 하면 말이지요. 정치도 마음을 열고 소통하면 적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사진=이태경 기자
-정치를 해보시니 어떻습니까? 연기보다 어렵지요?

“어렵고 힘들어요. 지역에 홍수가 나도 내 탓, 불이 나도 다 내 탓 같았지. 문화원장까지 해서 중랑구에서 봉사하던 8년간,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늘이 얼마나 푸른지를 몰랐어요. 그래도 할 때는 정말 깨끗하게 했어요. 판공비 1000원 한 장 받아쓴 적 없고, 경쟁 당하고도 큰소리 한 번 난 적 없죠.

고 이낙훈 선배가 11대 때 비례 대표로 나와 돕느라 시작했는데, 정치에서 배운 건 오로지 겸손이에요. 우뚝 서면 못 해요. 바닥부터 기어야지(웃음). 봄가을에 두 번씩 가정 방문하고, 계절마다 재래시장 가서 고등어 썰던 할머니 손도 많이 잡았지. 배우를 해서 그런지 손만 잡아도 니 편 내 편 딱 알아요.”

-어떻게 니 편 내 편을 알죠?

“고등어 썰다가 고무장갑 낀 채 손 내밀면 저쪽 편이고, 장갑 벗고 잡으면 내 편이야(웃음). 당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시청률 60%를 찍던 시절이라 ‘대발이 아빠’로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렇다고 덕을 봤나? 아니야. ‘마누라 구박해서 표 안 나온다'고 유세 다니지 말라더라고(웃음).

버려지다시피 한 가난한 동네에 개천도 덮고 길도 닦고 등기소도 내고 참 열심히 했어요. 60세에 다 그만두고 본업으로 돌아가면서 나처럼 돈 없는 사람 말고 좀 부자 정치인이 와서 이 동네를 살려줬으면 했는데,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더구먼. 지금도 나는 중랑구에 가서 아무 집이나 “밥 좀 주시오"하면 반겨줘요. 그만큼 친밀했죠.”

-정치하다 다시 연기를 시작한 작품이 김수현 작가의 ‘목욕탕집 남자들(1995년)'이었어요. 김수현 작가와 인연이 깊으십니다.

“그이가 내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끌어줬지요. 그런데 난 그것 말고도 복이 많았어요. 64년에 최초의 일일연속극(TBC의 ‘눈은 나리는데') 주인공을 했고, 80년대 최장수 일일연속극 ‘보통사람들'을 했어요. 햇수로 3년을 했어.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 하지요. 임성한 작가와 했던 ‘보고 또 보고'는 일일연속극 최고 시청률도 찍었어요.”

-오랫 동안 대가족의 아버지, 대통령, 왕 등 정통성이나 권위가 있는 인물을 연기해서 그런지 자존감이 강해 보이세요. 이번 영화 ‘덕구'에서는 고깃집 불판을 닦으며 손주들 키우는 남루한 노인인데도 불쌍해 보이지 않더라고요. 눈동자도 흔들림 없이 형형했어요.

“손주한테도 계속 가르치잖아요. 지금 형편이 어려워도 너는 명문가의 후예다. 네 목표는 대통령이다. 가난해도 자존감은 강한 영감이지. 일련의 사극에서도 그렇고 나는 상황은 비참할지언정 심지가 강해서 약해 보이진 않았어요. 교훈적 역할이 되고자 했지요.”

-현재 출연 중인 노희경 작가의 ‘라이브'에서도 역시나 힘없는 노인인데 존재감이 맑고 강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아버지'와 ‘할아버지'로 반듯하게 살아오셔선지 화면 저쪽에 말없이 있어도 의지가 돼요.

“허허. 노희경 작가가 경찰 지구대 이야기를 정말 ‘역작'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내가 젊은이들과 거기 참여하고 있다는 게 좋아요. 1~2장면만 나와도 의미가 있는 영감이에요. 좋은 작가의 작품은 신인에겐 발판이 되고 노인에겐 재발견의 기회가 되지요. 슬쩍 지나만 가도 나를 캐스팅한 이유가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합니다.”

영화 ‘덕구'에서 그는 죽음을 앞두고 혼자 손주 둘을 키우는 씩씩한 노인을 연기했다. 마지막까지 국경도 혈연도 뛰어넘은 보편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62년간 연기를 해왔는데 어떤 역할이 어렵습니까?

“얼마 전 했던 ‘돈꽃'처럼 존재감이 확실한 캐릭터는 오히려 쉬워요. 평범한 월급쟁이 남편 같은 무난한 역할이 어렵죠. 극에는 필요하지만, 특징이 없거든. ‘햄릿'에서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나 ‘대부'에서 알 파치노를 돕는 뚱뚱한 변호사 같은, 본인은 앞장서지 못하고 남을 돕는 자죠. 양보를 해야 하는 데 과욕을 부리면 균형이 깨져요.”

-과장된 감정 연기를 경계하십니다. ‘배우는 자기가 울면 안 된다'는 말씀도 하셨어요.

“연기는 상대를 위해 관객을 위해 내 욕심을 절제해야 해요. 영화 ‘덕구'에서도 덕구를 입양 보내는 장면에서 나는 ‘울지 말아야지' ‘절제해야지' 얼마나 다짐을 했다고. 배우가 슬픈 장면에 다 울고 기쁜 장면에 다 웃으면 관객이 민망해져. 너무 열연하면 안되는 거죠. 광기를 터뜨리는 건 오히려 쉬워. 일전에 ‘천일의 약속'이라는 영화를 보니 나탈리 포트먼과 스칼렛 요한슨이 참 잘했어. 특히 요한슨 연기가 딱딱 절제가 있더라고.”

-그러고 보면 표정의 변화가 크지 않으십니다.

“난 거울도 안 봐요. 심경은 표정에 자연스레 스미는 거야. 근육을 일그러뜨리면 그건 개그맨이지. 다만 깨끗하게 울 건지 꺽꺽거리며 울 건지, 눈물만 나고 콧물은 안 나게 울 건지, 테크닉은 다양하게 구사해야 해. 그런데 나는 또 나이가 들어서 울 때 콧물은 자제가 안되더구먼(웃음).”

욕망과 질서가 동시에 살아있는 균형잡힌 이순재의 얼굴./사진=이태경 기자
-35년생으로 방송계에서는 송해 선생을 빼고는 최고 어르신이라고 알고 있어요. 최전선에 있는 기분이 어떠신가요?

“난 사실 34년생이에요. 대전 피난길에 할머니가 호적을 잘못 올렸어. 어쨌든 나이 먹어서 앞에 있는 거지 돋보여서 앞에 있는 건 아니잖아. 나는 빛나는 정상에 한 번도 올라가 본 적이 없어요. 웬만한 사람은 다 탔던 동아연극상도 한번 못 탔지.”

-늘 정상에 있었던 거로 착각했습니다. tvN 예능 ‘꽃보다 할배'에서 별명도 늘 앞서가신다고 ‘직진 순재'셨고요.

“허허허. 실제로는 영화를 백 여 편이나 했으면서 대종상도 한번 못 탔어. 밀어주는 후견인도 없었고, 내가 잘 했을 땐 늘 더 잘하는 사람이 나타나 상을 채갔지(웃음). 옛날엔 트로피값을 내야 한다고도 했고. 유현목 감독과 ‘막차로 온 손님'을 열심히 했을 땐 기대를 했는데 이만희 감독의 ‘싸릿골의 신화'를 했던 최남현 선생이 받았어요. 시상식에 가서 턱시도를 입은 최 선생을 축하해드렸어요. 그 양반도 정말 거목이었거든.”

이순재는 60~70년대를 풍미했던 과거의 대배우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추억했다. 90년대 이후 우리가 정우성, 이정재, 한석규, 송강호, 최민식을 떠올리며 웃음 짓듯, 1세대 한국의 무비스타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는 선생의 목소리엔 자부심이 흘러넘쳤다.

“최남현, 김승호 선생은 토속 작품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했어요. 최무룡 선생은 메소드 연기의 달인이었죠. 김진규, 신영균, 박노식 같은 분들도 일가를 이룬 배우였어요. 악극단부터 시작해서 연기에 체계가 확실히 잡혀 있었죠. 신성일은 독보적인 톱스타였어요. 지금으로 치면 10조쯤은 거뜬히 벌었을 거야. 그런데 우리 때는 출연료가 박했고, 약속어음 받아가면 일을 했어요. 제대로 돈 받으며 일한 건 90년도 말부터야.”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야동순재'로 인기를 끌 때의 코믹한 모습.
-어쨌든 선생도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2007년 방송연예대상을 수상하셨습니다. ‘무한도전'팀과 공동수상이었던 걸로 알아요. 2016년엔 ‘꽃보다 할배'로 tvN 예능 아이콘상도 받으셨고. 말년에 상복이 더 많으세요.

“그랬죠. 그런데 ‘거침없이 하이킥'은 예능이 아니고 시추에이션 드라마였어요.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 같은 정통 희극 연기의 연장선이지. 사실 비극성을 강조하는 연기는 다 비슷해. 희극 연기에서 진짜 아이디어와 실력이 나오는 거죠. 그때 나문희 씨랑 나랑 발성, 눈, 표정을 정말 열심히 연구하며 맞췄어요.”

-‘야동 순재'는 불멸의 캐릭터예요. 점잖은 척해도 철부지 청소년 같은 엉뚱함이 있는 노인이었죠.

“영감이 야한 거 보다 들키면 그거만큼 마나님한테 창피한 게 어디 있어요. 당시엔 내가 그래도 명문고 명문대학 나왔는데 탤런트 돼서 망가졌다는 소리는 듣기 싫어서, ‘빼자!’ 그랬어요. 그런데 김병욱 감독이 메인이 난처해야 웃음이 나온다는 거야. 다행히 세상이 변해서 그런 생활문화가 양해가 되더라고. 그래도 난 여전히 웃기면서 가슴 뻐근한 그런 연기가 좋아.”

-페이소스가 있는 연기는 모든 배우의 소망입니다.

“맞아요. 스타닌슬라브스키 연기 이론에도 유머, 풍자, 아니러니, 야유 등이 있지만, 웃으면서 콧날이 시큰해지는 페이소스가 가장 높은 경지예요. ‘바냐 아저씨' 세자매' ‘갈매기' 벚꽃동산' 체홉의 4대 희곡도 스토리를 보면 비극이잖아. 내가 ‘앙리 할아버지와 나'라는 연극을 지금 전국을 돌면서 하고 있어요. 그 작품도 그렇지.”

여배우 박소담과 함께 전국 순회 공연 중인 연극 ‘앙리 할아버지와 나'.
-신구 선생과 더블 캐스팅으로 하는 연극이죠? 두 분 연기 스타일이 확연히 다릅니다. 발성부터가 다르지요. 신구 선생이 기미가 없이 훅 들어가는 힘을 뺀 연기라면, 이순재 선생은 말미를 다잡고 들어가는 힘 센 연기에요. 같은 호통을 쳐도 공기가 패이는 깊이와 각도가 다르죠. 동공의 밀도도 다르고요.

“다르죠. 그게 배우 예술의 독립성이야. 신구는 표현이 스트레이트하고, 나는 좀 더 디테일해요. 그게 볼거리죠. 영화 쪽에선 변희봉과 백윤식을 좋아하더구먼.”

-변희봉 선생과 백윤식 선생은 변칙적이고 돌출적인 에너지가 있어요.

“그래서 TV보다 영화에서 더 좋은 모양이야. 아무튼 잘들 하고 있어요.”

-본인의 클래식한 연기에 만족하십니까?

“아무래도 우리는 정통 소극장 연기를 했으니까요. 대학을 졸업하고 연극계의 거목 이해랑 선생이 하는 명동 동방살롱에 가서 맨날 인사하며 살다시피 했는데도, 기존 멤버들이 있으니 안 시켜주더라고. 그래서 실험극단, 광장, 민중극장을 만들어서 했어요. 형식도 속성도 아주 다르게 했죠(웃음).”

-돌아보니 전성시대는 언제던가요?

“나이 먹고 더 괜찮지 않았나 해요. 70년대 후반 TBC 드라마 시대 때는 군웅할거 했어요. 그중에도 최불암이 ‘수사반장'으로 탤런트 랭킹 1등을 먹었지. 2, 3, 4등이 역전시키기 쉽지 않았어. 나는 나이 먹어서 MBC에서 ‘사랑이 뭐길래' ‘허준' ‘상도' ‘이산' ‘베토벤바이러스' 같은 좋은 작품들을 했는데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주욱 전성기예요.”

-특히 ‘이산(2007년)'의 영조 연기 하시는 걸 걸 보고 후배 연기자들이 ‘이순재 선생님 정말 대단하시다'며 많이들 감동하더군요. 나이 먹어도 열정과 실력이 녹슬지 않고 더 벼려진다는 데 울컥했습니다.

“‘이산'의 영조도 ‘풍운'의 흥선대원군도 극적이고 카리스마가 강한 인물이지요. 용인 세트장에서 밤 9시부터 새벽까지 촬영할 했는데, NG내서 폐끼칠까 무진장 노력했어요. 영조는 학식이 높고 장기 집권했고 아들까지 죽인 왕이야. 복잡한 성격의 인물이었죠. 그때 공부도 숙제도 많이 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이병훈 감독이 ‘대장금'도 했지만 ‘이산'이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어요.”

우리와 대결하지 않지만, 대결할 정도의 힘이 있는 어른 곁에서 우리는 안정감을 느낀다./사진=이태경 기자
-인생 캐릭터가 올 때는 감지되는 어떤 기운이 있습니까?

“있지요. 그런 기회가 더러 와요. 그럴 땐 놓치지 말고 치고 올라가야 해. 죽기 살기로 해야지. 고만고만하게 하다 못 살리면 주저 않는 거야. 내가 ‘이산'의 영조를 맡은 것도 ‘허준' 할 때 스승 유의태 역할을 잘 했기 때문이거든.”

-연기도 삶도 전전긍긍하거나 눈치 보는 스타일은 아니세요. 할 말은 다 하고 사시면서도 젊은이들의 존경을 받는 이유가 뭘까요? 일명 사랑받는 ‘꼰대 '이신데요.

“어른이라고 행세할 필요는 없어요. 내가 염치를 가지고 지킬 걸 지키면 어른으로 대접해주는 거죠. 나는 누구한테든 강요하고 위세 부리는 걸 가장 경계해. 우리 직종이 바닥부터 시작해서 나는 어디 가서 폼 잡은 적이 없어요. 오히려 “네까짓 게 딴따라 주제에" 이런 괄시를 많이 받았지. 장가가기도 힘들 정도였다고. 일례로 우리 처남들이 은행에 다녀서 명절이면 집에 선물 상자가 쌓였어요. 우리 집은 추석이고 설이고 빈털터리지.

부러워하는 아내에게 내가 그랬어요. “이거 봐, 대신 재들은 싫어도 상사한테 세배하러 다닌다고. 당신은 그런 거 없잖아. 우린 다 동격이거든.” 재벌도 권력자도 아니지만, 무시당해도 흔들리지 않은 건 내가 하는 예술에 자부심이 있어서죠. 배역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그 자존심 하나로 살았지. 나는 연기 하려고 술도 안 했고 좋아하던 담배도 끊었어요.”

-욕망도 있고 눈치도 있으면서 질서 정연한 삶을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침없이 하이킥'이나 ‘꽃보다 할배'를 보며 안심이 됐던 건 선생이 그런 ‘자기'가 살아있는 노인이어서예요. 우리와 대결하지 않지만, 대결할 정도의 힘이 있는 어른 곁에서 안정감이 느껴진달까요.

“그게 바로 생명력이예요. 나이 들어도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새로운 과제를 달갑고 고맙게 받아야 해요. 수선스럽지 않게 일상을 유지하면서. ”

그가 부디 오래도록 우리 곁에서 직진해주길./사진=이태경 기자
70년대 후반, 한창 일할 40대에 부당하게 평가절하 받는다는 느낌이 들 땐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나를 활용하지 않는 건 슬픈 거니까. 1년을 헤매다 바로 치고 올라왔어요. 번쩍 빛이 나거나 화려하진 않았지만, 꾸준히 했어요. 그러면 됐지.” 거창하게 기념하고 싶지 않아 60주년 기념 공연도 작게 세레머니만 했다고.

-기나긴 인생에서 선생께서 깨닫고 지키는 어떤 룰이 있습니까?

“좀 손해 보고 살아야 큰 손해를 안 봐요. 하나 더 먹겠다고 달려들면 갈등이 커지고 적이 생겨. 정치할 때 그걸 배웠어요. 나는 표는 못 받아도 욕은 안 먹었어. 제일 가난한 동네에서 날 한 식구로 받아줬고, 정치적 정적과는 친구가 됐지. 너무 치열하게 경쟁하지 마세요. 살아보니 인생이란 건 여러 욕심이 있겠지만 조그만 손해는 감수하고 좀 모자란 듯 사는 게 좋아.”

-명예욕은 없으신가요?

“예술 장르는 끝도 완성도 없는 직진이에요. 자족하면 바로 정체지. 허허.”

영화 ‘덕구'와 드라마 ‘라이브'를 나는 이순재라는 언덕에 기대서 보았다. 유독 한 장면이 기억에 남아 아른거렸다. 집 나갔다 돌아온 외국인 며느리가 그에게 ‘아부지~’하며 안길 때, 이혼한 며느리 배종옥이 찾아와 푸념하듯 ‘아부지~’하고 말할 때. 뜨뜻한 우유를 품듯 가슴에 온기가 퍼졌다.

아버님도, 아버지도 아닌 ‘아부지’라니. 부드러움과 수줍음이 내비치는 다정함을 실어서 나는 속으로 그 음절을 읊어보았다. ‘아부지~ .‘

“나도 그 말이 좋더라고. 살다 보면 다 한 식구잖아.”

위엄은 있으나 위험 요소는 사라진 사랑스럽고 말랑말랑한 84세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언제나 직진했기에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우리 시대의 자존감 있는 어른. 이순재가 있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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