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최은희

조선일보
  • 김기철 논설위원
    입력 2018.04.18 03:16

    영화계에서 1961년은 춘향전의 해였다.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이 명보·수도극장,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이 국제·국도극장에 걸렸다. 신 감독 아내 최은희와 홍 감독 아내 김지미가 각각 춘향으로 나선 부부 대결이 호기심을 부채질했다. 결과는 '성춘향'의 압승이었다. '전무후무할 흥행-서울서만 74일간 38만명 관람' 1961년 4월 28일 자 조선일보는 '성춘향'의 성공을 톱기사로 실었다. 그해 서울 인구가 258만명이었으니 7명 중 1명꼴로 이 영화를 본 셈이다. 당시 최은희는 서른다섯, 이몽룡 역을 맡은 김진규는 서른여덟. 춘향전 역사상 최고령 커플이었다.

    ▶최은희는 흰 저고리와 치마가 잘 어울리는 한국적 미인이었다. 주요섭 소설을 영화로 만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나도향 원작 '벙어리 삼룡이' 등 신상옥 감독이 만든 영화에서 유교적 전통과 인습에 따르면서도 강인한 여인의 내면을 탁월한 연기력으로 담아냈다. 직접 메가폰을 잡고 '민며느리' '공주님의 짝사랑'을 연출하기도 했다. 

    [만물상] 최은희
    ▶최은희는 1978년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게 끌려갔다. 김정일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최은희는 '김정일은 거의 매주 금요일 나를 불러내 파티를 열었다'고 수기에 썼다. 김정일과 장성택 부부 등이 단골손님이었다. 어느 날은 김정일이 패티 김 '이별'을 불러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함께 납치된 신상옥에 따르면 '목포의 눈물' '노란 샤쓰의 사나이' '동백아가씨' '하숙생' 같은 남쪽 가요가 파티장 단골 레퍼토리였다. 최은희는 "북한에 있던 8년 동안 나는 인생에서 가장 긴 연기를 하며 살았다"고 회고했다.

    ▶영국 감독 로버트 캐넌과 로스 애덤은 2016년 최은희-신상옥 부부의 납치·탈출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를 개봉했다. 두 사람은 "이 사건을 들었을 때부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여전히 많은 진실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에는 최은희 부부가 북한에서 목숨 걸고 녹음한 김정일의 목소리가 담겼다.

    ▶최은희가 그제 아흔두 살의 생애를 마쳤다. 사전 서약대로 두 눈까지 기증했다. 그는 생전에 입버릇처럼 "나의 애창곡은 김도향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고 했다. 혼을 담은 연기와 영화 같은 삶이었지만 그 자신에게는 '바보 같은 인생'이었을까. 우리 현대사의 격동 한가운데에 있었던 한 여배우가 그 자신이 역사가 돼 우리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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