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추듯 휘두른 나이프… 그 리듬이 느껴지나요?

    입력 : 2018.04.17 03:01

    이정지 '80년대 단색조 회화' 展

    이정지의 ‘무제’(1985).
    이정지의 ‘무제’(1985). /선갤러리
    1972년 6월 7일자 조선일보에선 이정지(77)의 첫 개인전을 "예술과 생활이란 두 개의 가치에 끼어 고민하는 한 여성의 모습"이라며 "한국이란 풍토 속에서 미(美)의 창조를 계속하자니 일어나는 갖가지 현실의 난관이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70년대 초 여성 화가로서 첫발을 내디디면서 느꼈을 외로움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대목이다.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열리는 이정지의 '80년대 단색조 회화'는 작가가 70년대 이후 자신의 작품 세계를 얼마나 고집스럽고 단단하게 만들어갔는지 볼 수 있는 전시다. 그는 40여 년을 한결같이 모노크롬(단색조) 작업을 해온 유일한 여성 작가로 평가받는다. 주위에선 세계적 붐을 일으킨 '단색화'라는 타이틀을 걸라고 했지만 이정지는 "내 작품을 단색화로 규정해 시류에 편승하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다.

    작가는 캔버스 전면에 롤러로 색을 칠하고 나이프로 벗겨내는 반복 작업을 한다. 암갈색이나 회갈색, 검은색이 주로 바탕을 이루지만, 칠하고 긁어내기를 여러 차례 거치다보면 노란색, 흰색, 파란색 등 다양한 색채가 캔버스에 겹겹이 올라온다. 칠하고 긁어내는 일은 습관이나 관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호흡으로 이뤄진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몸의 움직임이 그대로 드러난다. 작가는 작업 도중 음악을 틀어놓거나, 노래를 흥얼거렸을지도 모른다.

    키 160㎝도 안 되는 화가가 세로 2m가 넘는 캔버스 앞에서 춤을 추듯 롤러와 나이프를 휘둘렀을 모습이 그림에서 연상된다. 얼마 전 작고한 유준상 미술평론가는 그의 작업을 '화신(化身·incarnation)'으로 표현하면서 "예술가의 몸은 그저 팔다리가 아니라 인간이 아닌 어떤 초월적인 존재의 뜻을 위탁받은 장치라는 걸 보여준다"고 했다. 27일까지, (02)734-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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