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바닷가에서..." 최은희 납북에서 탈북까지

입력 2018.04.16 22:08 | 수정 2018.04.16 22:40

1978년 1월 14일, 자신이 교장을 맡고 있던 안양예술학교의 후원자를 만나기 위해 홍콩을 방문한 최은희(당시 52세)씨는 ‘약속이 미뤄졌으니 바닷가에 놀러가자’는 지인을 따라나섰다.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 남자들이 나타나더니 무작정 배에 태우는 거예요.” 여배우 최은희씨는 그렇게 납치됐고, 홍콩 수사 당국은 “괴한들에게 북한으로 끌려갔다”고 했다.

최은희씨를 찾아나선 신상옥 감독도 6개월 뒤 납치됐다. 신 감독은 1월 27일 홍콩을 시작으로 6개월간 미국, 프랑스, 일본, 동남아 등을 돌아다니다 7월 홍콩에서 납북된다. 두 사람의 납북은 북한의 영화산업을 발전시키려는 야망이 있었던 김정일의 계획 때문이었다.

신상옥 감독의 납북 소식이 알려진 후 일부에서는 ‘자진월북설’이 퍼졌다. 신 감독이 박정희 정권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다가 미운털이 박혀 사업이 망해 북한을 택했다는 것. 신 감독은 1974년 예고편 검열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이 운영하던 영화사 신필름이 허가 취소를 당해 납북 전 4년 동안 영화 연출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신상옥 월북설’은 훗날 김정일의 육성이 공개되며 가라앉게 된다.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감독 로스 아담)’에 나온 북한 기록 사진. 김일성을 중심으로 신상옥, 최은희씨가 앉아있다.
납북된 두 사람이 북한 땅에서 재회한 것은 최은희 납북 5년 뒤인 1983년이었다. 최은희씨는 북한에 도착해 38살의 김정일(당시 노동당 선전선동비서)의 지원을 받아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지냈지만, 신상옥은 대부분을 수용소에서 보내며 탈출도 3번 시도했다.

최씨는 “아무것도 모른 상태로 납북 5년 뒤에 파티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신상옥 감독과 만났다”며 “이혼한 지 7년 만에 만났는데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어떻게 된 거야?’라고 말하며 웃었다"고 했다.

다시 재회한 두 사람은 김정일의 주선으로 다시 영화 작업을 시작한다. 두 사람은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촬영소 총장을 맡고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 '사랑 사랑 내 사랑'(1984년) 등 총 17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최은희씨는 북한에서 만든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한국인 최초 해외영화제 수상이었다.

신임을 얻은 이들은 1986년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여행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아 8년 만에 북한에서의 탈출을 시도한다. 비엔나의 미국대사관으로 무작정 달려 들어가 CIA 요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탈북에 성공한다.

최은희, 신상옥 납치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감독 로스 아담)’의 한 장면. 젊은 김정일과 배우 최은희 모습이다.
미국으로 망명한 두 사람은 3년간 워싱턴의 안가에서 생활하다 이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 할리우드 진출을 꿈꿨다. 신 감독은 저예산 아동 영화 ‘3 닌자’를 제작해 개봉해서 소소한 성취를 거두기도 했다.

할리우드에 안착하지 못한 두 사람은 1999년 한국으로 돌아왔고, 신 감독은 여전히 대형 프로젝트를 꿈꿨다. 칭기즈칸, 함흥철수작전 등을 영화로 제작하려다 실패하고 2006년 타계했다.

최은희씨는 이듬해 남편의 자서전 ‘나는 영화였다’를 펴냈고, 이어 자신의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을 통해 영화인생과 납치 사건을 공개했다. 최씨는 신 감독을 먼저 떠나보낸 뒤, 건강이 극도로 쇠약해져 오랜 투병생활을 해왔다. 16일, 그는 92세 나이로 신장투석을 받으러 병원에 갔다가 숨을 거뒀다. 책에 쓰인 여배우 최은희의 인생은 ‘분단국가’ 한국의 역사가 그대로 투영된 것이었다.

미국에 거주하며 1994년 헝가리를 방문했던 신상옥, 최은희씨.
'영화보다 영화같은 삶' 배우 최은희 별세… 향년 92세 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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