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레드벨벳'의 리더 아이린은 얼마 전 소설책 한 권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팬 미팅에서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답했다가 일부 남성 팬에게 '아이린도 페미니스트 아니냐'는 비난을 받은 것이다. 몇몇 팬들은 관련 음반과 상품을 불태우는 사진을 올렸다.
또 다른 걸그룹 '에이핑크'의 멤버 손나은도 비슷한 비난에 시달렸다. '소녀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Girls can do anything)'는 문구가 적힌 휴대 전화 케이스를 든 사진을 소셜 미디어에 올렸다가 악성 댓글이 빗발쳤다.
"아이돌이 과도한 '감정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는 이규탁 한국조지메이슨대 교수의 관련 논문을 최근 읽다가 무릎을 쳤다. '감정 노동'이란 자신의 마음 상태와는 무관하게 미소와 친절 같은 감정을 지속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업무 분야를 일컫는 신조어(新造語)다.
고객들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어도 참아야만 하는 전화 안내 센터와 대리점 직원, 항공기 승무원 등이 대표적이다. '감정 노동' 종사자 중에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그런데 한류(韓流)를 이끄는 케이팝(K-Pop) 가수들도 감정 노동자들의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이 교수는 진단한다. 페이스북·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는 물론이고 유튜브 같은 동영상 서비스가 중요한 홍보 수단으로 떠오르면서 가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이 24시간 노출되는 상황이 된 게 큰 이유다.
예전에는 인기 아이돌이라고 해도 음반 발표와 방송 출연, 공연이 활동의 전부였다. 집에 들어가 문만 걸어 잠그면 '퇴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로수길이나 홍대 입구에서 무엇을 먹고 입고 즐기는지 시시콜콜한 일상이 모두 '콘텐츠'라는 명목으로 상품화되고 있다. 자연스럽게 '사생활'이나 '퇴근'은 사라지고 언제나 팬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꾸며진' 취향을 드러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 교수는 이처럼 대중음악 종사자들이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에 종속되는 현상에 대해 '세계적 차원의 연중무휴 감시(監視) 체제'에 편입됐다고 지적한다. 군대와 공장의 감시와 규율 시스템이 '원형 감옥(파놉티콘)'과 닮은꼴이라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섬뜩한 비유가 떠오른다.
아이돌이 모든 팬의 마음에 들기 위해 본심을 숨겨야 한다는 사실은 '감정 노동'의 비극적 역설(逆說)이다. 사회·문화적 현상에 대해 일언반구(一言半句)하지 못한 채 언제나 방긋 웃는 표정을 지어야 한다면 '박제된 인형'이나 마찬가지다. 음악과 이미지라는 본말(本末)이 뒤집힌 소통 방식과 팬들에게서 케이팝의 위기 징후를 느낀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입력 2018.04.14.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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