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인사동에는 30년 넘게 탈만 만들어 파는 가게가 있다. 4평 남짓한 공간은 정겨운 얼굴로 가득하다. 가게 벽면 한쪽은 하회탈, 다른 한쪽엔 산대탈이 걸려 있다. 여유가 넘치는 양반 웃음, 바보스러우면서도 순박한 하인 웃음, 능글맞은 파계승의 웃음, 광기가 느껴지는 백정의 웃음까지 모두 가게 주인 정성암(60)씨가 만든 작품이다.
한국 탈에는 두 계보가 있다.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의식용 탈과 무대 위에서 광대가 춤추고 노래할 때 쓰는 놀이용 탈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하회탈은 의식용 탈로 진지하고 깊이가 있다. 반면 산대탈은 놀이용 탈로 색감이 화려하고 표정이 강렬하다.
정씨는 1984년부터 인사동 '탈방'에서 하회탈과 산대탈을 만들어왔다. 예부터 전해져오는 탈 20여 종을 그대로 재현한다. 정씨는 "같은 탈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만드는 사람의 개성이 담겨 다른 매력이 있다"면서 "색감과 질감에서 차별화된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정씨는 군 제대 후 하회마을에 가서 김동표 하회탈 명인에게 탈 만드는 법을 배웠다. 이후 남의 눈치 안 보고 탈만 만들고 싶어서 인사동에 가게를 냈다.
탈방의 탈은 대부분 15만~20만원으로 비싸다. 주변 가게는 주로 박리다매다. 2만~3만원으로 탈 가격을 낮추고 제품 종류를 다양화한다. 그만큼 만드는 시간은 짧아진다. 탈방은 몇 안 되는 종류의 탈을 긴 호흡으로 만든다. 탈을 만들려면 먼저 피나무를 10㎝ 두께로 잘라 2~3년을 말려야 한다. 필요 없는 부분을 깎아내고 얼굴을 조각한 뒤 물감을 섞은 찰흙으로 색을 입힌다. 조각과 채색하는 과정만도 길게는 이틀이 걸린다. 정씨는 "툭 튀어나온 광대를 깎는 데만 수십 번 터치가 필요하다"며 "공장 제품 찍어내듯이 만드는 2만~3만원짜리 탈과 차원이 다르다"고 자부심을 보였다.
가게 안쪽은 그의 작은 작업실이다. 나무를 가공하는 공방은 따로 두고 가게에선 얼굴을 조각하는 작업만 한다. 조각칼을 쥐었을 때는 들어오는 손님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친절에 익숙한 관광객에겐 퉁명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는 "휙 둘러보기만 하고 나가는 관광객들은 썩 반갑지 않다"면서 "탈의 가치를 아는 사람, 정말 탈을 좋아하는 사람만 알음알음 가게를 찾던 옛날이 그리울 때가 있다"고 했다.
[나전칠기 기능인, 일본인 손님 목 빠지게 기다린 사연]
고객층은 한정적이다. 90%가 외국인, 그중에서도 백인 중년 남성이다. 대부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가면을 수집하는 마니아다. 이들을 사로잡아 단골로 만든 것이 장수 비결 중 하나다. 정씨는 "한번 온 손님은 한국에 올 때마다 꼭 탈방에 들러 매번 다른 탈을 사 간다"면서 "탈에 대해 잘 아는 분들이 '환상적이다' '매우 훌륭하다'고 찬사를 쏟아놓아서 절로 기운이 난다"고 했다. 반면 탈을 사는 한국 손님은 적다고 아쉬워했다. "오히려 한국 사람들은 무섭다고 해요. 15만원씩 주고 탈을 사는 걸 이해 못 하죠."
손님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탈은 상상의 동물 '비비새' 탈이다. 허세 가득한 양반을 골리고 심판하는 역할로 도깨비와 닮았다. 화려한 색감과 강렬한 표정으로 외국인 손님의 이목을 끈다. 정씨는 "언뜻 보면 무서워 보이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눈매나 입가에 웃음기가 어려 있다"면서 "잔인한 표정을 강조한 일본 가면과 달리, 한국의 가면은 어느 구석엔가 해학이 있다"고 했다.
그는 "몸이 허락하는 한 10년만 더 가게를 지키고 싶다"고 한다. 병원 진단을 받을 때마다 "교통사고 당한 적이 있느냐"고 할 정도로 목과 어깨가 망가졌다. 날카로운 조각칼에 베여 손가락 신경이 끊어진 적도 있다. 아직 가게를 물려줄 사람을 찾지 못했다. 정씨는 "배우려고 찾아온 사람은 있었지만 거절했다"면서 "당분간은 탈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