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주년 맞은 조용필 "낼모레 70살이지만 중 2가 좋아하는 음악 한다"

입력 2018.04.12 06:00 | 수정 2018.04.12 16:34

68년 미8군 무대로 데뷔, 50주년 기념 콘서트 5월에 개최
매 끼니 소식, 새벽까지 음악 듣고 코드 받아 적으며 젊은 감각 유지
팬들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아’ 죽을 때까지 배우고 노래할 것

1968년 록그룹 '애트킨스'로 데뷔한 조용필. 이후 '돌아와요 부산항에',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허공', '고추잠자리', '친구여', '꿈' 등 수 많은 명곡을 탄생시키며 최고의 스타로 군림했다. 2013년 발표한 19집 앨범 수록곡 바운스(Bounce)와 타이틀곡 헬로(Hello)는 음원 차트 1위를 거머쥐며 젊은 세대와 호흡했다. 올해로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저는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있어요. 젊은이들이 나를 기억하면 그만큼 더 오래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러려면 어떤 음악을 해야할까? 그렇게 찾고 찾아서 ‘바운스’가 나왔고, ‘헬로’가 나왔어요. 저는 곧 칠십이지만, 중2가 들을 수 있는 음악을 해요. 그게 중요해요(웃음).” 68세의 ‘젊은 가왕’ 조용필이 말했다.

가끔 유튜브에서 2:8 가르마를 탄 젊은 조용필이 나비넥타이를 매고 ‘돌아와요 부산항에(1976년)'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뛰곤 했다. 자제력 있는 톤 앤 매너로 트로트를 부르는 젊은 날의 조용필과 음표가 튕겨 나올 듯 젊고 힙한 사운드의 신곡 ‘바운스(2013년)'를 부르는 늙은 날의 조용필은 그 ‘싱싱함'에서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 얼굴에 주름은 졌으되 그 노래엔 주름이 없다.

조용필의 노래를 처음 들었던 때가 생각난다. 머리통이 굵어졌던 열 살쯤이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열창하던 ‘창밖의 여자'부터, 리드미컬하게 스윙하던 ‘단발머리', 동요와 가요의 서사적 점이 지대에서 해 질 녘 서정을 드리웠던 ‘고추잠자리'가 나왔던 80년대는 이 ‘젊은 뮤지션'의 보컬과 사운드가 한창 무르익던 시절이었다. 1980년 발표한 그의 정규 1집은 대한민국 최초로 100만 장 이상 팔린 단일 음반이자, 1980년 전체 음반 판매량의 50%가량을 판매할 정도의 대히트였다.

◇ 50년간 부른 노래, 흘러간 추억 아닌 동시대의 클래식

조용필은 항상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장르를 향해 한발 한발 앞으로 갔다. 그 덕에 이 50년 차 가수의 노래는 현재 중학교 2학년 아이들도 따라 부른다. 추억을 먹고 사는 옛날 가수가 아니라 동시대의 ‘클래식'을 생산하는 당대의 뮤지션이 되기 위해 그는 음악 외에 모든 라이프를 자발적으로 '삭제'했다. 그는 지금도 최전선의 아티스트의 음악을 찾아 듣고 코드와 가사를 필사한다. 수순처럼 그는 대한민국 음악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중요한 좌표가 되었다.

조용필이 데뷔 50주년을 맞아 오는 5월부터 기념콘서트를 연다. 제목은 ‘Thanks to you’다. 5만 명 가까이 들어가는 잠실주경기장 티켓은 오픈 10분 만에 매진됐다. 생각해보면 그는 무대에서 항상 진지했고, 관객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현했다. 수년간 ‘가수왕'을 독식할 때도 트로피 앞에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여러분, 감사합니다'를 외치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4월 11일 오후 ‘가왕' 조용필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회를 맡은 음악평론가 임진모는 ‘1위라는 숫자는 대중가요 역사상 조용필을 위해 남겨두어야 할 영구 결번일지도 모른다’고 평했다.

조용필 1집.
축하 영상을 보내온 배철수는 그를 ‘내추럴 본 싱어'라고 했다. ‘우리가 시간이 흘러도 비틀스나 롤링 스톤즈의 노래를 듣는 것처럼 조용필의 노래는 듣게 될 것'이라고. ‘그는 대한민국 가요사의 전무후무한 고전’이라고. 아이유는 자신이 가수가 되어 ‘단발머리'를 불렀던 감격적인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조용필과 동시대에 가수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것 자체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 동시에 ‘50주년 기념 콘서트로 엄마를 흥분하게 해주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애틋한 마음을 전했다.

◇ 5살 때 하모니카 소리 듣고 음악에 반해, 미8군 무대 선 후 프로 결심

조용필은 흰색 슈트에 흰색 구두를 신고 무대에 올라 “저는 정말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너무 행복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50년 음악 인생을 회고했다. “지난 반세기 50년 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보답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음은 조용필과의 일문일답이다.

-어떤 호칭이 편합니까? 가왕? 국민가수? 최고 가수? 선생님?

“조용필 씨가 가장 좋습니다. 저는 선생님이나 가왕은 부담스럽습니다. 그런 호칭을 듣고 싶어 노래한 게 아니에요. 그냥 음악이 좋아서 했습니다.”

단지 음악이 좋아서 노래했던 조용필은 50년간 수많은 기록을 보유했다. 최초로 단일 앨범 백만 장, 일본 단일 앨범 백만 장, 누적 음반 총 천만 장, 예술의 전당 최초 공연, 뉴욕 라디오시티 국내 가수 최초 공연, KBS 가요톱텐 통산 69주 1위, 골든컵 10주 연속 수상, 방송 3사 동시 가수왕, 1988년 정부수립 50년 최고 스타상, ‘친구여'는 최초로 교과서에도 수록됐다.

-오랫동안 정상에 있으면서 피로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정상이 뭔지 기록이 뭔지 정말 잘 모릅니다. 정부수립 이후 최고 스타상, 이니 뭐니 잘 몰라요(웃음). 솔직히 뭐를 위해서 음악을 한 적도 없어요. 오히려 다른 사람이 좋은 음악을 발표하면, 왜 난 안 될까? 그런 마음으로 계속했어요.”

-미8군에서 음악을 시작해서 50년을 꾸준히 노래했습니다. 음악이 왜 여전히 좋습니까?

“저는 5~6살 때 하모니카를 들으며 처음 음악을 접했어요. 어떤 20대 청년이 하모니카를 부는 걸 듣고 충격을 받았어요. 아버지한테 하모니카를 사달라고 했죠. 그걸로 ‘푸른 하늘 은하수…’ 동요를 부르기 시작했던 게 음악과의 첫 인연이었습니다. 그 후로 축음기라는 도넛 판을 통해서 가요를 접하고, 라디오를 통해서 팝을 알게 됐고, 서울에 와서 형이 치던 통기타가 있어서 그걸 치게 됐어요.

처음에는 음악을 취미로만 하겠다, 그랬어요. 그런데 막상 친구들하고 합주를 하고 그룹을 만들어서 하다 보니 그게 취미가 아니라 완전히 빠졌어요. 미 8군에서 ‘엑스트라로 나와봐라’해서 갔죠. 1968년에 12월이었어요. 그때 무대에서 기타를 한번 치고 나서 큰 매력을 느껴서 결심했죠. 나는 음악을 해야 하겠다. 그런데 좋아서 연구를 하다 보니 계속 끊임없이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된 거죠. 그때의 충격이 여전해요. 저는 계속 배우고 있어요. 죽을 때까지 배우다가 끝날 것 같아요(웃음).”

-그동안 앨범을 20장을 냈는데 가장 애착이 가는 앨범이 있습니까?

“대부분 정성 들여 만들어서 어느 앨범을 꼽기 힘들어요. 곡으로 따지면 있을 수 있겠죠. ‘꿈’과 ‘추억 속의 재회’예요. 두 곡을 동시에 만들었는데, 한꺼번에 내기 아까워서 추억 속의 재회를 12집으로, 꿈을 13집으로 냈어요.”

-매번 사운드 퀄리티를 높이려는 혁신과 도전의 마인드가 있었는데요.

“도전은 아니었고 늘 음악 듣는 걸 좋아해요. 유튜브나 프로그램을 통해서 매일 듣다 보니 현재 미국 빌보드 차트나 세계 음악 경향에 대해 귀가 열려 있어요. 누가 누군지는 몰라도 음악은 다 알죠.”

50주년 기념 콘서트 ‘Thanks to you’ 기자 회견을 진행 중인 조용필.
-68년 데뷔 이래 그해의 중요한 음악이나 유행을 놓친 적이 없다고 했는데, 요즘은 어떤 음악을 듣나요?

“아일랜드의 밴드 스크립트와 호주의 시아 앨범을 들어요. 한 가수가 좋으면 앨범 전체를 다 들어요. 데뷔곡부터 어떻게 변해가는지, 코드는 어떻게 쓰고 곡에서 화성과 화음은 어떻게 처리하는지 듣죠. 기타리스트로 시작했기 때문에 들으면서 코드를 전부 적어요. 이 안에 멜로디가 어떻게 수록되는지 보는 거죠. 가사도 중요하게 보고요. 그렇게 들으면서 젊은 감각을 유지해요. 요즘 유행은 라틴이 대세이긴 한데, 길게 갈 유행은 아닌 듯해요.”

-바운스가 수록된 19집 ‘헬로'를 발표했을 때 63세였습니다. 그 노래는 노인부터 손녀까지 세대를 통합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동시대 가수로서 조용필이라는 존재의 위상이 더욱 확고해졌지요. 어떻게 그런 열광을 끌어낼 수 있었습니까?

“열광은 아니었어요(웃음). 모르던 분들이 저를 알게 된 정도죠. 저는 항상 제가 계속 음악을 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질문해왔어요. 저는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있어요. 젊은이들이 나를 기억하면 그만큼 더 오래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가령 15살이 나를 알게 되고 그 아이가 60세가 되면, 제 노래는 50년 더 기억되겠지요. 그러려면 어떤 음악을 해야 할까? 그렇게 찾고 찾아서 바운스가 나왔고, 헬로가 나왔어요. 록이나 소프트 록은 듣기는 하지만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면 나와 잘 안 맞았거든요.”

-사실 물리적으로 보면 영제너레이션에게는 ‘꼰대 '예요. 내가 꼰대라는 게 쉽게 받아들여 지나요?

“꼰대는 그냥 자연스럽게 오는 거니까 받아들여요(웃음).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죠. 거부하는 건 아니에요. 저는 일부러 “내일모레면 내가 칠십이야!” 그래요. 내가 이 정도로 나이 많아도 열심히 하고 있고 음악을 좋아하고 있다고 말해요. 저는 곧 칠십이지만, 중2가 들을 수 있는 음악을 해요. 그게 중요해요. 나이가 들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돼요(웃음).

음악도 그래요. 저는 미성인데 발성을 바꿨어요. 록을 할 수가 없었거든요. ‘House of the rising sun’은 A 마이너 키인데, 저는 G밖에는 올라가지 않았어요. 미8군 있을 때 그걸 A 마이너 키까지 올려서 불렀어요. 제가 누가 시킨다고 했겠어요. 정말 음악이 좋았던 거예요. 물론 운도 좋았죠. 나이 먹어 꼰대가 되도 자세는 똑같아요. 80살이 되면 못할 것도 같지만(웃음).”

-후배 가수들의 깊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엔 어떤 후배 가수를 주목해서 보고 있죠?

“누구다, 라고 얘기는 못 해요. 지금 현재 유명하면 ‘그 사람이 뭔가가 있다'라고 생각해요. 그 ‘뭔가’ 때문에 대중이 좋아하고 팬들이 열광하는 거죠. 엑소, 방탄, 빅뱅 공연도 유튜브로 봐요. 그런 친구들이 왜 유명한가 보면 노래를 잘 한다든지 잘 생겼다든지, 분명한 매력이 있어요.”

조용필은 자신이 지금 활동했으면 어떡할 뻔 했나 싶다며 멋쩍게 웃었다. ‘일찍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전 키도 작아요. 말이 좋아 작은 거인이지, 그냥 작아서 작은 거죠(웃음).”

조용필은 지금까지 정규앨범만 19집 20개 앨범, 비정규앨범까지 포함하면 50개에 달하는 음반을 발매했다.
-목소리도 늙기 마련인데 여전히 젊은 보컬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나요?

“나이 먹으면 제일 안 되는 게 소리에요. 그래서 연습하면서 소리에서 어느 부분이 가장 취약한가를 살펴요. 나이들면 중저음의 힘이 떨어져서 그것만 집중적으로 연습을 해요. 호흡과 배의 힘으로 어떻게 중저음을 받쳐줄까, 세심하게 연구를 하죠. 꿈이란 노래는 비행기 안에서 작사 작곡했던 곡인데, 연습할 땐 늘 그 노래로 시작해서 목소리를 풀죠.”

-20집 앨범 작업은 어느 정도 진척이 됐나요?

“바운스가 수록된 19집이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부담이 커졌어요. 이번 앨범은 더 잘해야지 욕심이 과하다 보니 수많은 곡을 접했어요. 지금까지 만들어진 곡이 6~7곡 정도예요. 현재는 5월에 50주년 공연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앨범 작업을 중단했어요. 저는 한번 꽂히면 다른 것을 못 해요. 두 가지를 동시에 못 하니 올해 앨범은 못 나옵니다.”

-완성된 6~7곡의 스타일은 어떤가요? EDM도 반영이 됐다고 들었습니다.

“EDM 중에서도 여러 갈래가 있는데 알란 워커(노르웨이와 잉글랜드의 DJ)가 제 취향에 맞아요. 어떤 분은 ‘그 나이 되면 인생에 관한 음악을 발표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요. 전 속으로 ‘웃기고 있네’ 그러죠(웃음). 음악은 음악일 뿐이에요. 그 자체가 세월이 지나면 역사죠. 인생은 시인이나 문학작품에서 논하면 돼요. 노래는 노래일 뿐입니다.”

‘고추잠자리'부터 ‘그 겨울의 찻집'까지 서사와 서정이 깃든 자신의 유행곡으로 뮤지컬을 만들 생각도 있다고 했다. “뮤지컬을 정말 좋아해요. 음악은 다 찾아다니는 편이라 브로드웨이에 한 달 동안 뮤지컬만 보기도 했어요. ‘맘마미아’도 보스턴에서 시험 공연할 때 찾아가서 봤어요. 어떤 작품은 11번씩 봐요. 음향, 무대, 세트 다 살피면서. 언젠가 노래를 그만둔다면 프로듀서나 뮤지컬 제작을 하고 싶습니다.”

-음악을 제외한 일상은 어떻게 보내나요? 후배들과 자주 시간을 갖는 편인가요?

“후배들도 다 각자 스타라 함부로 대하면 안 돼요. 존경해야죠(웃음). 저는 심심한 하루하루를 보내요. 심심하면서 바쁜 하루를 보내죠. 공연이 있으며 6~7개월 전부터 준비 들어가니까. 투어 1년만 해도 금방 지나가요.”

-방배동에서 혼자 노래방에서 노래하고 간다는 소문도 있었어요.

“그런 적 없습니다(웃음).”

-음악 말고 취미는 정말 없나요?

“없습니다. 심심하게 산다는 게 맞아요. 게임도 안 하고 취미를 물어보면 곤란해요(웃음). 와이프 있을 때는 음식 만드는 걸 도와주곤 했지만, 지금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차려주면 아침만 먹고, 점심 저녁은 또 밖에서 먹어요.”

-건강 관리는 어떻게 합니까?

“소식해요. 간식을 안 먹고 아침도 조금, 점심도 조금, 저녁도 일찍 조금만 먹어요. 새벽에 음악 듣고 있으면 배가 아플 정도로 고파요(웃음). 술을 안 한 지도 꽤 오래돼요.”

-가왕의 생활이 너무 심플하군요.

“만나자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웃음). 친구들도 사업하고 바빠서… ‘전화해, 밥 먹자’해도 보기 어려워요. 아프리카 세렝게티를 다녀온 이후로는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동물에 대한 프로나 내셔널 지오그래픽, 동물농장을 봅니다.”

록, 팝발라드, 포크, 디스코, 민요, 트로트, 동요 등 모든 장르의 음악을 소화해낼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음악들이 사랑 받았던 조용필. 5월 12일 잠실주경기장에서 6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연다.
-2005년 평양 공연에 이어 공연예술단 자격으로 얼마 전에도 평양을 방문했는데, 어땠습니까?

“그쪽 음악이 우리와 아주 달라서 저희 음악을 쉽게 받아줄까 고민이 많았어요. 표정만 보고 진짜 속마음은 잘 모르지만, 남한 노래를 이렇게라도 듣다 보면 경험을 통해 바뀌겠지요. 개인적으로는 2005년에 갔을 때 만났던 안내원을 다시 만나 반가웠고, 몸이 안 좋아 옥류관 냉면을 못 먹은 게 아쉬워요.”

-엘피로 데뷔해서 카세트테이프, CD, 디지털까지...매체가 변해도 그 시대를 석권했던 정상의 가수입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관객이 만족스러워할 때요. 그 순간보다 더 행복할 때는 없었어요(웃음).”

-2013년 ‘헬로우’와 ‘바운스’를 발표했을 때 ‘시간이 남지 않았다. 폭탄을 들고 뛰어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전히 시간에 대한 압박을 느끼나요? 매일 아침 어떤 각오로 일어납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밥 먹어야지’하는 생각부터 해요(웃음). 일어나면 일정표를 보고 할 일이 무엇인가를 챙겨요.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저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평생 저 사람 노래 들으며 살아왔는데 저 사람 그만두면 나는 뭐가 되나?’ 노래가 안 되면 지금까지 좋아했던 분들이 실망을 할까 봐 그게 두려워요.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지막 공연을 보면서 저는 저렇게는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제가 그만두면 팬들이 배신당하는 느낌이 들 것 같아요. 실망해도 좋다면 해야죠. 허락되는 날까지 해야지요.”

조용필의 음악에 왜 불순물이 없는 지 인터뷰가 끝나고서야 알았다. ‘음악의, 음악에 의한, 음악을 위한 인생’을 산 조용필. 그의 삶이 단순해질수록 우리의 귀는 황홀해졌다. 50년간 변함없이 통속과 예술의 황금률을 보여준 조용필에게, 땡스 투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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