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미국 존스홉킨스대의 한미연구소(USKI)에 대한 예산 지원 중단을 결정하는 과정에 직접 개입했다는 보도에 워싱턴 싱크탱크의 한반도 전문가들이 발칵 뒤집혔다. 한국 정부의 코드에 맞지 않는 USKI의 구재회 소장 교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국책 연구 기관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예산을 끊었다는 걸 충격으로 받아들인다.
대북 제재 전문가인 조슈아 스탠턴 변호사는 7일(현지 시각) '한국의 진보 정부가 미국의 대북 정책 토론을 검열하려 하다'는 글에서 '이 정권은 6명의 고위 공직자를 블랙리스트란 이름으로 감옥에 보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블랙리스트란 정치적 이유를 기준으로 정부 자금 지원을 끊는 것을 말한다'고 썼다. 그는 "한국 정부가 자금 지원을 끊을 자유는 있지만 학자들을 검열할 자유는 없다"고 했다.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연구원도 트위터에 '이번 사건은 다시 한 번 한국 진보 정부의 폐쇄성을 보여준다'고 썼다. 프랭크 자누치 맨스필드재단 소장은 "학문의 자유를 지키려는 갈루치(USKI 이사장)와 나살(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장)을 응원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구 소장 교체를 직접 요구한 적은 없다고 부인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8일 "국회 차원에서 제기돼 온 USKI에 대한 개혁 방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경제인문사회연구소가 구 소장 교체를 요구한 것"이라고 했다.
청와대의 해명에도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미 싱크탱크 내부 인사에 한국 정부가 개입하려 한 것에 주목한다.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결정되기까지 워싱턴의 싱크탱크들은 막후에서 정책과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 정책을 결정할 때도 백악관과 국무부 등은 한반도 전문가들과 거의 실시간으로 의견을 교환한다. 워싱턴 싱크탱크는 단순히 연구소가 아니라 정책 대안 생산 공장이자 관료를 공급하는 인재 풀이다. 그런 의미에서 워싱턴의 싱크탱크는 한국 대미 외교의 한 축을 담당해왔다. USKI 사태로 그 축이 흔들리는 것이다.
지난 주말 워싱턴 싱크탱크 전문가들 사이에서 '한미연구소(USKI) 사태'가 최대 화제였다. 워싱턴의 싱크탱크인 존스홉킨스대 USKI에 대한 예산 지원을 중단하는 결정 과정에 한국의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보도에 대해 워싱턴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어떤 전문가들은 "충격"이라고 했고, 또 다른 전문가들은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고 했다. 미국 전문가들은 다투어 관련 기사 링크를 보내달라고 했다.
한 전문가는 "USKI가 문을 닫으면 한국이 워싱턴에 쌓아올린 '200억짜리 공든 탑'(지난 12년간 예산 지원액)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파는 그 이상이다. 워싱턴의 관심은 한국 정부가 자신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싱크탱크에 대한 지원금을 끊거나 소장 교체를 요구하는 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에는 국제교류재단 등을 통해서 한국의 지원을 받는 싱크탱크가 여럿 있다. 이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한국 돈 받으면 한국 정부 입맛에 맞는 이야기만 해야 하느냐"이다. 한국 정부의 USKI 처리 방식이 수십년 공들여 쌓은 한·미 간의 네트워크와 신뢰를 뒤흔드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한국 정부의 지나친 관여에 대한 불만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한 전문가는 "어느 싱크탱크에서 한국 관련 위원회를 만드는 과정에 한국 정부가 과도한 관심을 보여 불편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한국 정부의 입장이나 정책에 대한 비판 글을 쓰면 꼭 누군가를 통해 연락이 오더라"고 했다.
USKI 사태와 관련해선 이미 몇 달 전부터 "정부가 손을 볼 것"이란 소문이 워싱턴에 퍼져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데이비드 스타인버그 조지타운대 명예교수는 지난달 한 칼럼에서 "일각에서 미국 정가에 영향을 끼치려는 한국 정부의 노력이 도가 지나친 면이 있고, 너무 짧은 시간에 비현실적으로 많은 것을 기대한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썼다. 그는 "한국이 출연기금 제공을 이유로 너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려 한다면 이는 큰 시행착오가 될 것"이라고도 했다.
워싱턴 싱크탱크 사정을 잘 아는 한 전문가는 "10여년 전 워싱턴에 한국 관련 연구가 척박할 때 USKI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주요 싱크탱크에 한국 프로그램이 개설된 만큼 좀 더 발전된 프로그램을 내놨어야 한다는 지적은 일부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은 워싱턴 분위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너무나 거친 방식이었다"고 했다.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역대 한국 정부는 한국학 프로그램 설치 등 한국 알리기에 공을 들여왔다. 조윤제 주미 한국 대사의 부임 후 일성도 "공공외교 강화"였다. '보이지 않는 노력의 축적'을 강조했다. 주미 대사관에 공공외교팀도 신설했다. 하지만 워싱턴에선 "한국 정부의 공공 외교는 한국에 대한 워싱턴 여론을 바꾸겠다는 의지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 불편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USKI 사태도 거칠고 서툰 대응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외국 정부 영향력'에 대한 워싱턴 분위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워싱턴 싱크탱크들은 최근 외국 정부 영향력을 극도로 경계한다. 2014년 9월 뉴욕타임스는 겉으로는 독립성을 표방한 싱크탱크들이 외국 정부의 거액 지원을 받고 사실상 로비 회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심층 추적 기사를 보도했다. 이후 싱크탱크들은 외국 정부의 '손길'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2015년부터는 미국 싱크탱크 전문가들이 의회 청문회 등에서 증언을 할 때는 해당 증언 내용과 관련된 외국 정부로부터 받은 최근 지원금 내역을 공개하게 돼 있다.
USKI는 다른 싱크탱크들과 달리 한국에 특화한 연구소로 한국이 원하는 맞춤형 연구와 회의가 가능했던 연구소였다. 로버트 갈루치 이사장 등 현재 워싱턴 분위기에서는 소수파인 '대북 대화파'로 분류되는 전문가들의 목소리도 높았다. 한국의 여당 정치인들이 방미해 USKI를 다녀가면 "언론 보도와 달리 미국에 대북 온건파도 많더라"는 얘기를 할 정도로 현 정부와 입장도 맞았다. 하지만 이번 USKI 사태는 현 정부의 대북 정책에 우호적이었던 갈루치 이사장까지 등을 돌리게 만든 측면이 있다.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이런 식으로 대응하다가는 정권이 두 번만 바뀌면 워싱턴에 한국의 친구는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