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ESSAY] 대전현충원의 '얼굴 없는 천사'

  • 권율정 국립대전현충원장

    입력 : 2018.04.06 03:09

    권율정 국립대전현충원장
    지난 2015년부터 대전현충원 순국선열 묘소 앞에는 꽃이 꽂힌 돌화병이 하나둘씩 남몰래 놓이기 시작했다. 경비원이 묘역을 순찰하면서 발견한 것과 유족들이 궁금해 물어온 것을 합하면 50여 개에 이른다. 누가 가져다 놓은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하나같이 돌화병에 추모(追慕) 문구를 새기고 날짜를 적어놓은 것을 보면 한 사람이 한 것 같다. 화병에는 '가정주부'라고만 밝히고 있다.

    '울타리가 되어줘서 고마워요. 가족분들 슬프지만 힘내세요. 2016년 6월 3일 영화 '연평해전' 관람객: 철드는 가정주부.'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참수리 357호 병기부사관 고 황도현 중사 묘소의 화병에 새겨진 문구다.

    '대한민국과 국민을 향한 헌신 기억합니다! 2017년 3월 8일.'(연평도 포격전 전사자인 해병대원 문광욱 일병 묘소) '기억합니다. 지식은 경험자 앞에서 구식입니다. 2017년 9월 5일.'(천안함 46용사 구조 과정에서 순직한 해군 특수전(UDT/SEAL) 요원 고 한주호 준위 묘소)

    이 얼굴 없는 천사는 2015년 대전현충원에 조성된 제2연평해전(6명) 및 연평도 포격(2명) 합동묘역 묘소에 돌화병을 많이 가져다 놓았다. 이 묘역뿐 아니라 332만㎡ 부지에 12만5000위가 안장되어 있는 대전현충원 곳곳에서 이런 돌화병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3년 동안 드러내지 않고 이런 선행을 한 이분은 순직자 자녀들의 중·고등학교 입학 시즌이 되면 교복 사는 데 보태라고 필자에게 돈을 부치곤 했다.

    올 초에는 지난 2006년 공군 블랙이글스 소속으로 수원비행장에서 순직한 고 김도현 소령의 큰아들 건우군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시점에 맞춰 교복 구입비로 30만원을 보내주었다. 당시 곡예비행 도중 기체 결함으로 추락하던 고 김 소령은 관람객을 보호하기 위해 비상탈출을 포기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조종간을 놓지 않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비행기를 몰아 산화했다. 고 김 소령은 아들 둘을 두고 있었다. 이분은 사고 당시 신문 기사 등을 보고 아들 나이를 추산한 것으로 보인다.

    대전현충원에는 10년 전 응급환자 이송 중 헬기 추락으로 순직한 간호장교 선효선 소령이 안장되어 있다. 그는 당직근무가 아니었지만 응급환자가 발생했다는 연락을 받고 출동해 환자를 이송하던 중 헬기가 추락하면서 순직했다. 지난해 초 그분은 고 선 소령의 큰딸 은채양이 중학교에 입학할 때에 맞춰 교복 구입하는 데 보태달라며 25만원을 보내주었다.

    유족들은 "그분을 알 수 없느냐"고 묻고 현충원 측도 노력했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그분은 우편환 송금을 하면서 편지 겉봉 발신자란은 공백으로 남겨놓았다. 다만 수원 지역 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지역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분은 우편환 증서에 동봉한 손 편지에 무슨 용도로 써달라는 당부와 함께 말미에 '철 드는 가정주부'라고 했는데, 이는 묘소에 놓인 50여 개 돌화병에 새겨진 것과 같은 말이다. 이로 미뤄 묘소에 돌화병을 바치고 호국영령들의 자녀 교복 구입비를 보내준 사람은 동일한 사람으로 보인다.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반도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지만, 6·25전쟁 이후 최고의 안보 위기라는 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신 호국영령을 추모하고 기리는 이런 분들의 마음은 그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우리의 든든한 자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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