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韓에 北 편에 서지 말라고 경고하는 트럼프

조선일보
입력 2018.03.31 03:15

트럼프 미 대통령은 29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서명을 북한과의 협상이 타결된 이후로 미룰 수 있다"면서 "왜 그러는지 아느냐. 이것이 매우 강력한 카드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보통의 한국 사람들은 이 말뜻을 이해하는 데 한참이 걸려야 했다. 한·미 동맹 역사에서 들어보지 못한 공개적인 경고인 데다 김정은과의 북핵 협상과 한·미 FTA가 무슨 관계인지 언뜻 알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뜻을 뜯어보니 보통 심각한 내용이 아니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한국 특사단을 통해 자신에게 전달한 비핵화 약속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보여주지 않을 경우, 한·미 간에 잠정 합의된 FTA 타결안(案)을 없었던 일로 하고 한국 측에 더 불리한 방향으로 재협상하겠다는 뜻이다. 대체 김정은의 속임수에 대한 책임을 왜 북한만이 아닌 한국도 져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지금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한·미·북·중 간에 치열한 수 싸움이 진행 중에 있다. 김정은의 속셈도 처음 드러났다. 25년간 핵개발을 위해 써먹었던 '단계 조치' 주장을 또 들고 나왔다. 최단 기간 내에 북핵 폐기 완료를 원하는 트럼프 구상과는 배치된다. 그런데 한국 청와대의 입장이 김정은의 주장을 따라가려는 듯한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가 30일 "핵을 한꺼번에 폐기한 후 보상을 하는 리비아 방식은 북한에 적용하기 힘들다"고 한 것은 미국의 의구심을 부채질할 우려가 있다. 리비아 방식은 존 볼턴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이 북핵 해법으로 주장해 왔고 청와대도 그동안 "단칼에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듯이" 일괄 타결하는 방안을 말해 왔다. 그랬다가 김정은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비핵화를 "단계적, 동시 조치"로 하겠다고 하자 그 입장에 장단을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트럼프의 대한(對韓) 경고는 이 시점에서 나왔다. 남북 정상회담을 앞둔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김정은 편을 들지 말라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달 초 워싱턴을 방문한 우리 특사단이 김정은의 미·북 정상회담 제안을 전달했을 때 트럼프 대통령이 즉석에서 수락하면서 그런 사실을 우리 특사단으로 하여금 직접 발표하도록 하자 트럼프 대통령 참모들조차 "이례적"이라며 의아해했었다. 한국이 대화를 통한 북핵 해결을 중재했으니 그 결과도 한국이 책임지라는 뜻 아니냐 싶었는데 트럼프 대통령의 지금 태도가 딱 그렇다. 거기에다 이제 한국 정부와 북한이 '단계 조치'에 합의하고 미국에 이를 들고 오지 말라는 뜻까지 포함됐다.

북핵을 없애려면 한·미가 한 몸처럼 움직여도 힘들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을 미국이 아닌 북한과 한 팀인 것처럼 취급하기 시작했다. 트럼프의 사려 깊지 못한 태도도 문제지만 정부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길래 미국 대통령 입에서 이런 말까지 나오느냐는 우려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단계적, 동시 조치'는 핵 폐기는 먼 미래의 목표로 정해놓고 거기까지 가는 과정마다 북한에 대가를 주는 방식이다. 지금의 대북 제재는 몇 달 안에 허물어질 것이다. 한번 무너진 제재망을 다시 복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다음에도 김정은이 핵 폐기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국민을 속이는 것이다. 정부가 북한을 달래려 노심초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김정은에게 끌려다니다가는 북핵 해결의 천금 같은 기회를 날려 보내고 한·미 동맹까지 잃어 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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