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이철원

#사례 1. 지난 27일 한국여성민우회(민우회)는 "게임 제작사 'IMC게임즈'의 페미니즘 사상 검증을 규탄한다"는 성명서를 냈다. 이 회사가 만든 게임을 하던 10~20대 남성 사용자들이 게임 제작에 참여한 스태프 중 하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비난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들은 해당 스태프가 민우회 소셜미디어 계정을 팔로하고 '한남(한국 남자를 비하하는 은어)' 같은 단어가 포함된 글을 공유한 것 등을 지적했다. 이런 항의에 밀려 결국 그 스태프는 회사 대표와 면담하고, 사과문까지 올렸다. 그러자 이번엔 민우회가 반발한 것이다.

#사례 2. SM엔터테인먼트 소속 5인조 걸그룹 '레드벨벳'의 리더 아이린(본명 배주현)은 책 한 권 읽었다가 곤욕을 치렀다. 그가 최근 팬미팅에서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말하자 남성 팬들이 '아이린도 페미니스트였다'며 비난 글을 올린 것. 일부는 레드벨벳 앨범이나 관련 '굿즈(MD 상품)'를 불태우는 사진을 게시하기도 했다. 인기 6인조 걸그룹 '에이핑크'의 멤버 손나은은 지난 2월 소셜미디어 계정에 '걸스 캔 두 애니싱(Girls can do anything)'이라고 적힌 스마트폰 케이스를 든 사진을 올렸다가 남성 팬들이 '페미니스트 선언이냐'는 식의 악플을 달자 사진을 내렸다.

'90년생 김지훈'은 역차별을 받고 자랐다?

"남자라서 양보하고 무거운 거 들고….역차별당한 90년대생 남성들을 달래기 위한 소설을 쓰려 합니다."

최근 모금 사이트 '텀블벅'에서 '82년생 김지영'에 대항하는 소설 '90년생 김지훈'을 쓰겠다면서 모금을 부탁하는 글이 올라왔다. 책의 목차엔 '전쟁 중인 나라, 의무는 남자들만' '여직원들은 왜 야근 잘 안 해요?' 같은 내용이 있었다. 페미니즘 진영에서 남성 우위 사회를 비꼬는 데 쓰는 '미러링(뒤집어 보여주기)'을 남자들이 이용한 셈이다. 모금은 무산됐지만, 많은 청년 남성이 이에 공감을 표하며 화제가 됐다. 중장년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청년층까지 반(反)페미니즘 성향을 드러내는 건 이전과 다른 경향이다. 본지가 포털 사이트에서 페미니즘 관련 기사 10건에 달린 악플 4000여 건을 분석해보니 사용자 80%가량이 10~20대 남성이었다.

전문가들은 지금 청년층 남성들이 이전 세대보다 남녀평등이 진전된 사회 분위기에서 자랐다는 점을 지적한다. 1990년 이후에 태어난 남자들은 학교나 사회에서 학업 성적이나 취업 등 여러 면에서 여성에게 밀리는 경험을 한 적이 더 많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통계도 이를 뒷받침한다. 꾸준히 여성이 우월했던 학업 성취도뿐 아니다. 그간 남성이 더 높았던 대학 진학률과 20~29세 청년 고용률도 2009~2011년에 남녀 역전이 일어났다. 1990년 이후 출생한 이들이 청년층에 진입할 무렵이다. 이후 남녀 간 대학 진학률과 청년 고용률 격차는 점점 커지는 실정. 양성평등연대 같은 남성 단체는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10~20년 뒤엔 학교나 직장에서 여성 우위가 확고해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군 가산점 제도가 폐지된 후 20대 남성 군 복무에 대한 실질적 보상이 없고, 힘들고 거친 일은 남자만 맡는다는 등 생활 속에서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직장 익명 게시판에는 '여자들은 왜 황금 연휴 전에 꼭 생리하느냐'는 식으로 여성들이 특권을 누린다는 비아냥도 적지 않다.

점점 격렬해지는 페미니즘 마녀사냥

"1990년이 여아 낙태가 절정인 해였다는 건 알고 하는 이야긴가요?"

하지만 이런 '남녀 차별 세대론'은 허점이 많다. 당장 '90년생 김지훈'이 화제가 되자 1990년은 태아 감별로 여아 낙태가 가장 심각했던 해라는 반론이 나왔다. 1990년생 남녀 성비는 116.5대100이다. 인구 통계 집계 후 가장 격차가 컸다. 청년층을 넘어가면 고용률도 역전된다. 30대 이상부터 여성 고용률은 50~60% 부근에서 점점 낮아진다. 남성 30~50대는 80~90%를 유지한다. 평균 임금 역시 남자가 더 높다. 지금 20대 남성 청년들이 역차별을 당한다고 느끼는 건 사회 진입 이전의 일시적 현상일 뿐, 사회는 남성 우위가 여전하다는 분석이 가능한 부분이다.

게다가 남성 청년층의 반페미니즘이 점점 도를 넘는다는 점도 문제다. 단순히 비난 댓글을 다는 게 아니라 소비자 지위를 악용해 사실상 사상 검증을 벌이는 식이다. 특정 소설을 읽거나 민우회 같은 여성 단체 소셜미디어 계정만 팔로하는 등 상식적 행동을 비난하며 '페미니스트가 아니란 걸 증명하라'고 압박한다.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사람이 다니는 회사 제품 불매운동을 하거나 생업에 피해를 끼치는 일도 벌어진다. 지난 2016년 한 인터넷 게임 제작에 참여한 성우가 페미니즘을 상징하는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올렸다가 하차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후 게임 회사들은 비슷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사과문을 올리거나 해당 직원을 교체하는 등 조처를 했다. 또 페미니스트란 공격을 받은 직원이 만든 캐릭터를 교체한 게임 '소울워커'는 이후 남성 이용자들이 '(페미니스트를 자른) 갓(god)게임'이라고 몰려들면서 인기 순위가 올라가고 있다. 10~20대 남성들이 주 소비층인 게임이나 걸그룹 업계에선 이런 압박 때문에 사실상 페미니즘 경보령이 내려진 상태다. 한 대형 걸그룹 소속사 관계자는 "아이린이나 손나은 케이스를 보면서 남자 팬들이 상상 이상으로 이 문제에 예민하다는 걸 깨닫고 있다"며 "우리 멤버들에게도 '소셜미디어에서 페미니즘 관련 발언을 자제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우회는 "직무와 무관한 노동자의 의식을 검열, 검증해서 불이익을 가하는 것은 인권침해이자 명백한 불법행위"라고 비판했다.

이화여대 사회학과 함인희 교수는 "2000년 이후 저성장 시대에 실업 같은 청년 문제도 심각해진 가운데 자란 청년층이 품은 불만이 표출되는 한 사례라고 본다"며 "남성은 그런 불만의 원인을 사회 구조 문제가 아니라 손쉽게 여성에게서 찾고, 그들을 희생양 삼아 공격하는 현상이 도를 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