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중 정상회담 이후 청와대와 정부 일부에서 "비핵화와 북한 체제 보장 문제를 일괄 타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단계적 비핵화'도 방법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중국과 북한에 '코드'를 맞추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된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북·중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라면서도 그 방안으로 "단계적 동시 조치"를 언급했다. 1994년 이후 매번 북한의 합의 파기로 실패했던 방식을 되풀이하겠다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정부가 포괄적·일괄적 타결 대신 '단계적 접근'으로 비핵화 프로세스를 수정할 경우 적잖은 혼선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청와대 김의겸 대변인은 29일 북·중 정상회담을 환영하는 공식 논평을 냈다. 김 대변인은 "김정은 위원장이 북·중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남북 정상회담 및 북·미 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의지를 확실히 밝힌 것은 의미가 크다"고 했다. 또 "중국이 한반도 평화 논의에 참여하게 된 것은 정세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이 "한·미가 나의 노력에 대해 선의로 답해 평화를 위한 단계적 동시 조치를 취한다면"이라는 조건을 내건 것에 대해선 논평하지 않았다.

그동안 청와대는 북한 비핵화와 종전(終戰) 선언 및 평화 체제의 일괄적·포괄적 타결을 여러 번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작년 7월 베를린 구상을 통해 "북핵 문제와 평화 체제에 대한 포괄적 접근으로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도 최근 북핵 문제의 일괄 타결 방식을 시사하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겠다'는 발언을 했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6일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과거의 실패에서 비롯된 우려에 대해 철저히 대비하겠다"고 했었다. 미국은 그동안 북핵 문제에서 '협상→보상→도발→협상'으로 이어지는 뫼비우스 띠 같은 상황을 '과거의 실패'로 규정해 왔다. 이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가 김정은의 '단계적 보상 전략'에 맞춰 곧바로 '일괄 타결' 방침을 바꾸기는 힘들지 않겠느냐"고 정부 관계자는 전했다.

하지만 북·중 정상회담 이후 청와대 기류에 미묘한 변화가 엿보이면서 정부의 대응 시나리오가 바뀔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청와대 관계자는 "북한도 어찌 됐든 비핵화 단계에 따라 반대급부가 있어야 대화에 응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는다는 말도 쏙 들어갔다. 협상과 보상을 여러 단계로 나누는 '단계적 접근'을 다시 검토할 수 있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남북 및 미·북 정상회담 상황을 보며 '단계적'으로 풀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일단 북한과 대화 테이블에 앉아 서로의 비핵화 방안을 다 올려놓고 논의해 가자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21일 "회담을 준비할 때 각각의 제안들이 우리와 북한, 미국에 어떤 이익이 있고 그 이익들을 서로 주고받게 될 것인지 설명하고 설득하도록 준비하라"고 했었다.

북한이 과거처럼 핵동결 같은 형식적 조치를 취하면 한·미 훈련 축소나 제재 해제 같은 '보상 조치'를 제시하는 시나리오가 준비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청와대 관계자는 "포괄적 접근과 단계적 접근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것"이라고 했다.

남북 정상회담 자문위원들도 잇따라 '단계적 조치'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볼턴(미국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이 리비아 방식 얘기하는데 이 사람 생각을 고쳐야 한다. 우리가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고 했다. 또 "미국은 그동안 일괄 타결을 언급하며 북한에 비핵화 보상에 대한 희망을 주지 않았다"고도 했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도 "일괄 타결하더라도 그 실천은 단계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북한과 중국이 선호하는 단계적 접근 방식으로 방향 전환할 경우,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겨냥하는 미국과의 공조에 이상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이러면 미·북 간 비핵화 협상이 제대로 시작도 못한 채 혼란에 휩싸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