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미래] 투자 생태계, 상당히 기울어져 있어…'젠더'라는 안경 써야 바로 볼 수 있죠

입력 2018.03.27 03:03 | 수정 2018.04.02 16:09

[Cover Story] 2030 여성 심사역 3人이 말하는 젠더 관점의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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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밀레니얼 세대인 이들에게 ‘투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 중 하나였다. 배경도, 전공도 다른 이들이 소셜벤처 임팩트투자사 ‘에스오피오오엔지(sopoong)’를 선택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왼쪽부터 박혜민· 임소희·유보미 심사역./장은주 C영상미디어 기자
'임팩트(Impact)' 전성시대다. 사회적 가치와 수익,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하는 '임팩트 금융(투자)'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지난달 22일엔 임팩트금융국가자문위원회(NAB)가 출범했다. 정부도 팔을 걷어붙였다. 올해 300억원 규모의 사회투자펀드를 신설, 이후 5년간 최대 1000억원 규모까지 확충한다. 100억원 규모의 고용노동부 사회적기업 모태 펀드, 소셜벤처 대상 1000억원 규모 '임팩트 투자 펀드'도 조성할 예정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 임팩트 투자금이 많아지면 비즈니스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기회도 늘어날까.

6.5%. 지난 2016년 국내 스타트업 중 투자를 유치한 여성 창업가의 비율이다(244곳 중 16곳). 이 기업들이 유치한 투자 금액은 총 450억원. 전체 스타트업에 흘러간 투자금(1조724억원)의 4%에 그치는 액수다. 여성 창업가가 여성 심사역을 만날 기회도 희소하다. 2015년 기준, 여성 심사역은 전체의 7%에 불과했다. 드러난 수치만 놓고 봐도, 여성 창업자에겐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상황. 국내에서 임팩트 투자를 이야기하는 대다수 역시 남성이다보니 "특정 성별로 돈이 흐르지 않도록 하려면, '젠더 관점의 투자(Gender Lens Investing)'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에 더나은미래는 국내 최초로 '젠더 관점의 투자' 보고서를 만들고 투자 심사에 적용한 2030 여성 심사역 3명을 한자리에 모았다. 3명 모두 우리나라 최초의 '소셜벤처' 전문 임팩트 투자사인 '에스오피오오엔지(sopoong·이하 소풍)'의 전·현직 심사역으로, 지난 3월 8일 발간된 젠더 관점의 투자 보고서 '젠더 안경을 쓰고 본 기울어진 투자 운동장'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지난 21일 성수동 카우앤독에서 유보미(소풍 심사역)·박혜민(현재 타 스타트업 근무)·임소희(임팩트 벤처캐피털 옐로우독 투자심사역) 심사역을 만나 '젠더 관점의 투자가 필요한 이유'를 들었다.

‘젠더 관점 투자’, 전 세계적인 추세

―젠더 관점의 투자란 무엇인가.

유보미(이하 유)=
투자자가 젠더 평등한 관점에서 투자하는 걸 뜻한다. ‘젠더 관점의 투자’의 공동저자 재키 밴더브룩은 “안경을 쓰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이는 것처럼 젠더의 안경을 쓰면 세상을 명확하고 다르게 볼 수 있다”고 비유했다. 여성에게 좋은 서비스를 만드는 곳에 투자할 수도 있고, ‘남성이 90% 이상이면 투자를 안 한다’는 식으로 부정적인 요소를 최소화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가령 여성에게 월경 제품 및 정보를 제공하는 ‘이지앤모어’는 젠더 관점 투자에서 좋은 사례다. 이지앤모어에선 여성들에게 월경컵 선택권을 넓혀주고, 제품 구입 시 발생하는 포인트로 청소년에게 월경 제품을 제공한다. 이지앤모어 조직 자체의 모든 구성원이 여성이기도 하다.

박혜민(이하 박)=젠더 관점의 투자가 꼭 ‘여성’ 대상 서비스에 국한되는 건 아니다. 사회 정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여성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도 포함된다. 해외 ‘스프링 액셀러레이터(Spring Accelerator)’는 교육 기회가 적고 위험에 노출된 동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지역 내 여성들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스타트업에 투자한다. 지난 10월 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소캡(SOCAP·Social Capital Markets·사회적자본)’ 콘퍼런스에서 만난 도나 머튼이란 여성은 그린피스에서 30년간 기후변화를 위해 일하다 ‘체인지 파이낸스(Change Finance)’를 설립했다. 청정에너지 기술을 개발하거나 여성이 이끄는 조직으로 상장지수펀드(ETF)를 구성했다. 여성 리더를 늘리는 게 투자의 목표기도 하다. 자본의 영향력을 멋지게 활용한 사례다.

우리나라에선 아직 생소하지만, ‘젠더 관점 투자’는 전 세계적으로 떠오르는 키워드다.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3월 8일 ‘여성에 의한, 여성의 투자가 늘고 있다’는 기사를 보도하며 “환경을 생각하는 투자자들이 자신의 투자가 환경에 미칠 영향을 따지듯, 나의 투자가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따져보는 것이 바로 젠더 관점의 가치 투자”라고 언급했다. 지난해 10월 ‘와튼 소셜임팩트 이니셔티브’는 ‘전 세계 젠더 관점의 투자 및 대출펀드·벤처캐피털’을 들여다 본 연구에서 “2017년부터 성장세가 확연하다”고 결론 내렸다.

―소풍에서 ‘젠더 관점 투자’ 보고서를 발표하고, 올해 상반기부터 적용했던 이유가 뭐였나.

박=투자 업계에선 ‘여성에겐 투자 안 한다’고 대놓고 말한다거나, 옷차림이나 외모를 평가하는 등 젠더 감수성 수준이 낮은 곳들이 많다. 소풍은 젠더감수성이 높은 편이었고(웃음), 매번 투자를 최종 결정하고 나면 여성 창업자 비율은 확인했다. 그런데 지난해 여름 투자를 결정한 4개 팀 중엔 여성 창업팀이 하나도 없더라. 당시 지원팀의 20% 정도가 여성 창업가였다. 그때까지도 비즈니스 모델이 좋은 곳을 선택한 결과라고 여겼지, ‘젠더 편향’이 있다고 생각 못 했다. 투자자가 여성 성비 문제를 제기하면서 우리끼리 이야기를 시작하게 됐다.

임소희(이하 임)=심사역과 파트너가 다 같이 모여 이 문제를 두고 장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여성 대표를 향해 조금의 편견도 없었을까’ ‘여성 창업가가 기술 분야 이야기를 하면 전문성이 부족한 것 같다고 내심 생각했던 적은 없었을까’ 등 어려운 질문들이 오갔다. 긴 대화 끝에 우리 안에 편견이 있었다는 걸 뼈아프게 인정해야 했다.

박=사회 임팩트를 추구하고 다양성을 지지한다고 말해 왔는데, 투자를 결정하는 시스템을 들여다보지 못했더라. 모두에게 충격적이었다. 그러다 지난 10월 말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소캡 콘퍼런스’에 갔을 때 ‘젠더 관점의 투자’라는 용어와 맥락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우리가 적용하면 좋겠다 생각해서 돌아와 보고서를 작성할 TF를 꾸렸다.

평평하지 않은 투자 운동장… ‘젠더’ 관점 안경 필요해

―투자할 때 어떤 젠더 편견이 있나.

임=사회적인 편견이 자본 흐름을 결정하는 투자 생태계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여성 대표가 ‘개발자를 데려오겠다’고 하면 ‘잘 데려올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여자는 기술이 약할 거란 편견인 거다. 더 일반적으론 여성 창업자에겐 ‘결혼은 했는지, 임신 계획이 있는지, 아이가 있다면 일·가정 양립이 가능한지’ 등을 묻는 투자자도 많다. 남성 창업자라면 결코 받지 않을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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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 유보미, 박혜민, 임소희 심사역.
박=특히 임팩트 투자 영역에선 이러한 젠더 편향을 알아채긴 더 어렵다. ‘누가 봐도 잘못됐다’ 싶은 것보단 내재된 편견이 영향을 주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가령 남성 대표는 매출이 잘 안 나와도 ‘잘하고 있다’고 하는데, 여성은 월 매출이 수천만원을 넘어도 ‘부족하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스트레스가 심한 환경이면 남성에 비해 여성이 좀 더 위축되는 경향을 보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여자 대표는 너무 소극적이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회적으로 학습된 영역을 개인 능력 차로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남녀를 떠나 ‘투자는 비즈니스 모델로 결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텐데.

임=일단은 드러난 수치만 봐도 기회 자체가 너무 불평등하다. 프로세스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반증이다. 투자를 정하는 단계에서 ‘젠더 편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연구로도 입증됐다. 2014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와튼 스쿨, MIT 스쿨 연구원들이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동일한 발표자료’를 각각 남성 및 여성 목소리로 녹음한 뒤 남녀 투자자 그룹에 들려줬을 때, 68%가 ‘남성’에게 투자하겠다고 결정했다. 여성에 대한 편견이 자원 배분에 영향을 미치고, 이러한 편견을 더욱 강화하는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내에서도 초기 단계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털 전체 규모의 5~10%만이 여성 대표에게 간다.

박=‘남성적인 여성도 있고, 여성적인 남성도 있는데 편 가르는 것 아니냐’고도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사회에서 학습된 인식 자체가 동등하지 않다. 또 여성 특혜를 주는 것 아니냐고 하는데, 젠더 관점 투자야말로 ‘남녀를 떠나 정말 잘하는 곳에 투자하는 눈’을 키우려는 거다. 안경을 쓰면 더 넓고 명료한 시야가 확보되는 것처럼, ‘젠더’라는 시각으로 바라봐야 동등한 시선으로 잘하는 곳을 찾아낼 수 있다.

실제로 다수의 연구에서 ‘젠더 관점 투자’를 했을 경우 수익률이 더 높다는 것이 입증됐다. 조직의 ‘다양성’을 반영하는 척도이기 때문.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에 따르면 미국 내 다양성 상위 25%인 기업은 평균 이상 재무수익을 얻을 확률이 15% 높았고, 경영진의 젠더 다양성이 10% 상승할 때마다 영업 마진이 1.6% 오른다. 실리콘밸리에선 여성 심사역 비중이 높을수록 벤처캐피털의 수익률이 높다는 조사도 있다.

젠더 관점, 투자 업계 내에 확산되려면

소풍은 올해 상반기 정기 투자부터 젠더 관점의 투자 가이드라인을 적용하고, 최소 1개 이상의 여성 창업 기업이 포함돼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평균 25% 수준이었던 여성 창업가의 투자 유치 비율을 마지노선으로 삼은 것. 서류 평가 시엔 대표자를 포함한 구성원 전체의 성별을 기입하게 하고, 여성 대표자 팀 비율이 일정 비율 이상이 되도록 심사 원칙을 적용했다. 사전 면접 시엔 ‘젠더 관점 관찰자’가 참석해, 여성 대표자가 면접 과정에서 젠더 편향적인 발언 및 행동을 경험하지 않는지 진단한다. 투자 심의 항목에 ‘다양성과 젠더 렌즈’ 항목을 추가했고, 계약 시엔 팀이 지켜야 할 젠더 관점의 경영을 권고하는 가이드라인(Creating Change Guideline)을 배포한다.

―실제 ‘젠더 관점 투자’를 적용해보니 어떤가.

유=과정 내내 ‘젠더 편견’은 없는지 계속해서 돌아보게 되더라. 투자 심사 항목에도 ‘젠더 관점’을 추가해, 여성의 자본 접근을 확대하는지, 업무 환경은 어떠한지, 여성이나 소녀를 이롭게 하는 서비스가 있는지를 새롭게 들여다보고 있다. 면접 전엔 참석자 모두에게 ‘젠더 관찰자’가 동석하며, 창업자 및 심사역 모두 젠더에 대한 편견이 없어야 한다고 설명 드린다. 본인은 괜찮은데 자꾸 ‘여성 창업자’라고 부각되는 점이 부담된다는 분도 있었고 ‘편견을 없앤다는 취지 자체만으로도 고맙다’는 대표님도 있었다.

올해 상반기, 소풍에서 선발한 총 6팀 중 여성이 (공동)대표인 곳은 총 3곳이다. 재난 대응을 위한 도상훈련 툴킷을 개발하는 ‘뉴베이스’, 신장병 환자를 위해 저염식·맞춤 음식을 정기 배송하는 ‘맛있저염’, 음성언어를 문자화하는 기술을 보유한 ‘소보로’ 등이다. 그 밖에도 당일 먹을 수 있는데 버리는 음식을 플랫폼화한 ‘미로’, 오존을 용해해서 수질 정화하는 ‘LS테크놀로지’, 재정적으로 어려운 학생에게 교육 기회를 주기 위해 후불식 P2P 대출서비스를 제공하는 ‘학생독립만세’ 등이 이번 정기 투자 프로그램에서 선정됐다.

―향후 (임팩트) 투자 생태계 내에서 젠더 관점 투자를 확산하려면 어떤 논의가 더 필요할까.

임=옐로우독에서는 현재 꽤 큰 규모로 펀드를 조성 중이다. 이 펀드의 임팩트를 측정하는 7가지 지표 중 하나로 ‘젠더 평등(gender equality)’을 포함시켰다. 여성의 역량을 강화하거나, 여성에게 실제 혜택이 돌아가는 곳, 젠더 편향을 바꾸는 곳에 투자하는 게 우리가 원하는 ‘임팩트’라고 잡은 거다. 또한 임팩트 투자는 어디까지나 투자지 자선이 아니다. ‘사업모델’과 ‘가능성’을 보고 투자하는 것인데, 젠더 관점의 투자를 두고 ‘여자라서 투자받았다’는 식으로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 자원의 분배 방식을 바꾸는 데 우리가 가진 영향력을 쓰는 거다.

유=보고서가 나간 뒤에 한 남성 VC에게서 메일을 받았다. ‘VC로 일한 지 20년이 됐는데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지적해줘서 고맙다, 덕분에 좋은 고민의 시발점이 됐다’는 내용이었다. 앞으로 투자 생태계 내에 ‘젠더 렌즈’를 보다 확산시켜서 더 많은 여성 창업자를 발굴·육성하는 것이 1차 목표이자 주요 미션이다.

박=일단 여성 심사역·파트너가 많아져야 한다. 전체의 7%는 너무 적다. 투박한 방식이지만 '할당제'를 시작해서라도 여성 심사역과 파트너 숫자를 늘려야 한다. ‘젠더 관점의 투자’ 보고서가 구체적인 설루션으로서 많이 응용되면 좋겠다. 또한 내가 속한 조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 싶다는 분들을 만나고 싶다. 각자 있는 자리에서 가진 영향력을 모아, 함께 변화를 만들어간다는 느낌을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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