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미래] '복지 사각지대' 여성 지원 사업… 국내 기업이 보이지 않는다

입력 2018.03.27 03:03 | 수정 2018.03.27 13:46

젠더 이슈와 기업 사회공헌 실태

100大 기업 사회공헌 프로그램 중 여성 취약계층 지원은 2개뿐
외국계 기업, 여성 지원 적극적… 전문인력 양성에도 관심 쏟아야

안옥선(가명·57)씨는 여성 노숙인 임대주택 시설의 행복 전도사다. 늘 웃는 얼굴로 사회복지사와 이웃을 대한다. 하지만 그가 웃음을 찾기까진 수년이 걸렸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 이혼 후 집을 나온 그는 20년 전부터 방황을 시작했다. 고된 삶 때문에 정신 질환까지 발병해 거리 생활을 했다. 노숙인 시설, 정신장애인 시설을 전전했지만 갑작스레 찾아오는 공황장애를 홀로 견디기가 고통스러웠다. 그랬던 안씨가 달라졌다.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챙기는 여유도 생겼고, 오랜 기간 인연을 끊고 지냈던 자녀들과의 관계도 좋아졌다. 최근엔 임대주택을 나와 가족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복지 사각지대 최전선, 여성 노숙인 돕는 기업

안씨의 행복은 '집'에서 시작됐다. 이랜드복지재단이 2016년 11월 정신 질환을 가진 여성 노숙인을 위한 5200여 만원 규모의 임대주택 지원 사업을 시작한 덕분이다. 임대 보증금을 지원받아 주택에 입주한 그는 매일 사회복지사를 만났다. 상담은 물론 생활 관리도 받았다. 노숙을 하며 불규칙한 수면과 불균형한 영양으로 낮아진 면역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것. 옥상 텃밭에서 채소를 가꾸며 마음 치유도 하고, 1층에 마련된 커뮤니티 공간에선 함께 입주한 이들과 친목도 나눴다. 상태가 호전되자 안씨는 자신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찾아나섰다. 매일 오후 그녀는 정신장애인 사회복지시설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그 외 시간엔 공공근로를 통해 돈을 모으고 정식 취업도 준비한다.

안씨를 포함, 정신 질환을 안고 거리를 전전하던 여성 17명이 함께 살고 있다. 병원이나 시설 등 다소 강제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자율적이면서도 편안한 분위기가 강점이다. 주거 지원은 물론 지역사회 정착을 위한 개별 사례 관리까지 결합된 모델이라, 여성 노숙인들은 임태주택을 입주 희망 1순위로 꼽는다.

그동안 노숙인, 정신장애인 영역은 기업 사회공헌의 불모지로 여겨졌다. 성과를 당장 볼 수 없는 데다가 사회적 편견 때문에 홍보의 어려움도 있기 때문. 특히 주요 소비층이 아닌 미혼모 등 취약 계층 여성을 위한 사회공헌은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이다.

더나은미래가 매출액 상위 100대 기업의 사회공헌 프로그램 307건을 분석한 결과, 여성 취약 계층을 지원하는 사회공헌은 다문화 여성 카페를 지원하는 포스코의 '카페오아시아', 한 부모 여성 경제 자립 프로그램인 아모레퍼시픽의 '희망가게' 등 2건에 불과했다(2017년 기준). 임대주택을 운영하는 서정화 열린여성센터 소장은 "여성 노숙인의 주거 문제에 정신장애를 위한 설루션까지 제공하는 기업은 이랜드 사업이 거의 처음"이라며 "대다수 여성 노숙인들이 정신 질환, 알코올중독, 성매매 피해 등 복합적인 문제를 안고 있어 지원이 절실한데 사례 관리가 어렵고 리스크가 높다는 이유로 외면당한 게 사실이다"고 말했다.

사회적 편견 맞서는 미혼모, 사회공헌으로 자립 도와

여성단체들은 미혼모를 선뜻 돕는 기업을 찾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더나은미래가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한국여성재단·아시아여성연구소·열린여성센터·구세군 등 주요 여성단체 및 복지기관에 문의한 결과, 이케아코리아와 KDB나눔재단이 양육 미혼모의 삶과 자립을 지원하는 기업으로 손꼽혔다. 이케아코리아는 지난해 5월 한국여성재단과 함께 총 1억원 규모의 '맘업(Mom- Up)'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서울·경기권의 양육 미혼모 30여 가정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고 정기적인 자조모임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이케아 광명점의 홈퍼니싱 컨설턴트들이 워크숍에 참여, 자녀들의 성향과 각 가정에 필요한 주거 환경을 파악해 맞춤 컨설팅을 진행한다. 가정당 200여 만원 지원금으로 공부방 개선에 필요한 이케아의 수납용품, 책상 등 가구와 소품 등을 배치했다. 한 달에 1번씩 자조모임에 참여하는 엄마들은 육아, 일 등 서로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누고 1박2일 캠프를 통해 양육 스트레스도 해소한다. 정완숙 이케아 코리아 매니저(corporate communication)은 "참가자의 96.4%가 '매우 만족한다'고 응답했고, 대다수 엄마가 공부방 마련 이후 자녀들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며 고마움을 전한다"고 설명했다. 맘업 프로젝트에 참가한 한 엄마는 "그동안 홀로 어려움을 이겨내야 한다는 게 힘들었는데 자조모임을 통해 큰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이케아코리아의 ‘맘업 프로젝트’ 참가 가정의 공부방. 이케아의 공간 컨설턴트가 양육 미혼모 가정과 상담, 진단해 가구와 소품들을 배치해준다.
이케아코리아의 ‘맘업 프로젝트’ 참가 가정의 공부방. 이케아의 공간 컨설턴트가 양육 미혼모 가정과 상담, 진단해 가구와 소품들을 배치해준다. / 한국여성재단 제공
양육 미혼모 지원을 위해 한자리에 모인 KDB나눔재단과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관계자들.
양육 미혼모 지원을 위해 한자리에 모인 KDB나눔재단과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관계자들. /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제공

KDB나눔재단은 양육 미혼모 자립을 돕는 'KDB트라이앵글 지원사업'을 4년째 이어가고 있다. 임신부터 출산 후 36개월 미만의 자녀를 둔 예비 또는 양육 미혼모를 대상으로 맞춤형 지원이 이뤄진다. 의료 서비스 지원은 물론 사회복지사와 상담사를 통해 심리 치유를 받고, 자원봉사자가 양육도 돕는다. 지금까지 총 5억6000만원 규모로 5556명의 양육 미혼모가 출산·주거·상담 지원 등을 받았다.

여성 단체 및 활동가 지원 등 장기적 안목 필요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는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비영리단체들의 역량 강화나 애드보커시(옹호 활동)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미투 운동으로 여성 상담 및 법률 지원을 하는 비영리단체들의 역할이 급격히 커졌지만, 정작 이 단체와 파트너십을 맺거나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기업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 교보생명이 여성재단과 15년째 파트너십을 지속하며 여성 활동가들에게 쉼을 제공하는 '짧은 여행 긴 호흡' 프로그램이 우수 사례로 항상 거론되는 이유다. 올해부턴 국제적인 시각을 갖춘 여성 활동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독일의 여성 시민사회 운동 현장과 혁신 사례를 탐방하는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유한킴벌리는 2007년 미래 여성 양성 장학 사업을 시작, 2009년부터는 성공회대 내 ‘NGO 실천여성학 석사 과정’ 수료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유한킴벌리는 2007년 미래 여성 양성 장학 사업을 시작, 2009년부터는 성공회대 내 ‘NGO 실천여성학 석사 과정’ 수료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 한국여성재단 제공
유한킴벌리 역시 10년 넘게 여성 활동가를 위한 장학 및 교육 지원 사업을 지속해온 기업이다. 2007년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재단, 성공회대와 함께 미래 여성 양성 장학 사업을 시작한 유한킴벌리는 2009년부터 성공회대에 'NGO 실천여성학 석사 과정'을 설립했다. 페미니즘 등 여성주의 기초 이론부터 여성 정책 연구, 여성 리더십 방법론 등 다양한 과목이 개설돼 있고 1년치 등록금도 지원받는다. 현재까지 117명의 수료생이 배출됐다. 3개월 단기 과정으로 'NGO 여성 리더십 과정'도 진행, 10년간 활동가 560여 명이 해당 과정을 이수했다. 김혜숙 유한킴벌리 상무는 "석사 과정을 수료한 한 서울 시의원은 '서울시 여성 인권 조례를 만들 때 큰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면서 "전문성과 인적 네트워크를 쌓은 여성 활동가들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지원이 지속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연보 성공회대 NGO 실천여성학 교수는 "직접 사업을 통한 사회공헌만이 정답은 아니다"라며 "전문성 있는 여성 단체들의 역량을 키워 시민사회와 기업이 협력해 임팩트를 키워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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