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이해할 수 없었다… '民主化' 위해 싸운 운동권이 北정권 편드는 것을"

    입력 : 2018.03.19 03:03

    [북한 정보의 핵심에 25년간 다가간 일본인… 이시마루 지로(石丸次郞)]

    "정보의 핵심에 더 가까이 가려는 게 기자의 욕심
    목숨 걸고는 못했지만 내 인생을 걸고는 해왔다"

    "北 경비병은 내 손에서 빵을 빼앗아 봉지 뜯고
    얼굴을 처박고 먹으며 '하나 더 달라' 손 내밀어…"

    우리 특사단의 김정은 면담 성과 발표가 있고 엿새가 지난 뒤였다. 일본 프리랜서 기자 모임의 인터넷 매체 '아시아프레스'에서 이런 특종(特種) 기사가 떴다.

    '북한 북부 지역에 사는 취재 협력자 3명과 3월 11일까지 수일간 연락했다. 북한 주민들은 4월 말 진행한다고 발표한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회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기사를 쓴 이시마루 지로(石丸次郞·56)씨는 북한에는 3회, 북·중 국경 지역에는 90여 회 취재한 북한 전문 프리랜서다. 북한 안에 열 명의 유급(有給) 취재원을 갖고 있다. 때마침 서울에 출장 온 그를 만났다.

    이시마루씨는“특사 회담은 경제 봉쇄로 공화국을 압살하려는 적들의 비열한 책동을 무찌르는 김정은의 위대한 업적으로 선전됐다”고 말했다.
    이시마루씨는“특사 회담은 경제 봉쇄로 공화국을 압살하려는 적들의 비열한 책동을 무찌르는 김정은의 위대한 업적으로 선전됐다”고 말했다. /오종찬 기자
    "오늘(15일) 다시 내부 협력자들과 연락해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했다. 지난 9일 당(黨) 초급 이상의 간부들을 대상으로 '뛰어난 외교적 안목을 지니신 위대한 장군'이라는 강연이 열렸지만, '이번 특사 회담이 경제 봉쇄로 공화국을 압살하기 위한 적들의 비열한 책동을 무찌르기 위한 김정은 장군의 위대한 업적'이라고만 했지 남북과 미·북 정상회담에 대해선 언급이 없었다. 다음 날 주민을 대상으로 한 '생활총화'(자기비판모임)에서도 특사 방문 사실만 알렸고 그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특사가 다녀간 뒤로 북한 정권에서 남북 및 미·북 정상회담에 관해 침묵하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보나?

    "이런 급선회를 김정은의 권위 훼손 없이 어떻게 대내외적으로 설명·선전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북한 내부 협력자들에게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를 밝혔다'고 전하니, '진짜인가? 핵 강국인데 그걸 포기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는 우리 특사의 전언(傳言)밖에 없다. 그 뒤로 북한이 공식 확인을 해준 적이 없다. 물론 반박하지도 않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대화 국면이 진행되고 있다. 북핵 완성 단계에서 마침 문재인 정부라는 좋은 상대가 나타나 지금 같은 극적인 상황 전환을 만들었다. 북한이 원했던 것이다. 미·북 정상회담의 가능성까지 생겼으니, 유리그릇처럼 다뤄 안 깨지게 하겠다는 조심성을 보이는 것이다."

    ―북한 정권은 '경제적으로는 어려워도 핵무기를 가진 군사 강국'이라는 선전으로 지탱해왔다. 핵무기를 빼면 정권의 축(軸)이 무너진다. 그런 북한과의 핵 폐기 협상이 현실적으로 진전될 수 있을까?

    "제재 압박이 계속될 경우 북한의 장래가 안 보인다. 말라죽게 될 것이다. 광물·수산물 등을 취급하는 무역 회사들 중에는 문 닫은 데가 많았다. 기름 수입이 막혀 군대 운반 수단으로 목탄차와 소달구지를 쓰는 일이 생겨났다. 군관에 대한 처우가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국제 제재에 굴복해 비핵화 회담을 한다는 말이 확산되면 김정은 정권이 흔들릴 수 있다. 이 때문에 북한은 '핵보유국'으로서 미국과 대등한 협상을 한다고 선전할 것이다."

    일본 오사카 출신인 그는 도시샤(同志社)대 재학 시절 좌파 운동권이었다.

    "우리는 '광주 민주화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국 대학생들의 용감하고 자기 희생적인 모습에 감동했다. 한국 민주화운동에 연대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북한에는 심정적으로 동조한 반면, 한국에는 어둡고 무서운 군사 독재국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84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는 충격을 받았다.

    "한국은 경제 발전의 과실을 누리고 있었고, 어둡고 무섭기만 한 사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학생들이 시위만 하는 게 아니라 청춘을 즐기고 있었다. 한국 학생들과 함께 디스코텍에 간 적 있었고 정치 토론도 벌였다. 외모는 닮았으나 생각이 많이 달랐기에 너무 재미있었다."

    대학 졸업 뒤 그는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2년간 유학했다. 그 시절 동구권이 무너지고 중국에서는 천안문 사태가 발생했다.

    "다음은 북한이 붕괴될 차례라는 관측이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북한에 대해 심정적인 연대가 있었다. 한국에서 말하는 북한 정보는 '반공(反共)에 의해 왜곡된 것'으로 봤다. 일본에서도 북한의 실체를 폭로한 책들이 나왔지만 그때는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로 북한의 정체는 드러났다. 김씨 세습 독재에 의한 인권 탄압 참상이 공개됐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한국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운동권 출신들이 이런 북한을 위해선 싸우지 않는 것이었다. 이중 잣대를 들이댔고 오히려 북한 정권 편에 섰다."

    그는 1990년 귀국해 광고 회사를 2년 다니다가 마이니치신문에 지원했다.

    "내가 '서울특파원과 한반도 문제를 전문으로 하고 싶다'고 하니, 신문사에서는 '7년간 지방 근무와 사쓰마와리(경찰서 출입기자)를 해야 한다'고 했다. 7년을 그렇게 버리고 싶지 않았다. 일본에는 분쟁 지역 취재에서 활약해온 프리랜서의 전통이 있었다. 그들의 세계가 멋있게 보였다."

    1998년 북한 나진에 지원 식량을 들고 갔을 때.
    1998년 북한 나진에 지원 식량을 들고 갔을 때.
    ―한국이 아닌 북한을 전문 취재 영역으로 삼게 된 계기는?

    "이미 한국은 민주화됐기 때문에 한국이 어떤 사회가 될지는 한국인이 결정할 수 있게 됐다. 우리 같은 외국인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일본 조총련을 통해 북한에 취재 의사를 전했으나 답이 없었다. 북한이 보이는 중국에 가서 기회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1993년 여름 두 달 동안 압록강에서 백두산을 거쳐 두만강까지 북·중 국경을 따라 여행했다. 탈북자와 조선족을 만나 북한 내부 상황에 대해 얘기를 들었다. 백두산 정상에서 만난 북한 병사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조선족인 국경경비대가 운전하는 지프차로 정상에 올라가자 북한 경비병 두 명이 다가왔다. 몰골이 형편없었다. 사과·빵·맥주를 들고 나와 '같이 먹자'고 말하기 전에 이들은 내 손에서 빵을 빼앗아 봉지를 뜯고 얼굴을 처박고 먹었다. 그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그런 북한 병사가 먹으면서 '하나 더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때까지 갖고 있던 북한에 대한 생각이 무너져버렸다."

    한국의 말지(誌)에서 이를 사진 특집으로 실었고, 일본 위성방송에도 보도됐다. 프리랜서로서 데뷔작이었다. 그는 1995년 단체관광 팀에 끼여 평양에 갔다.

    "일본 니가타에서 전세기를 탔다. '평양 여행에는 자유가 없고 보여주는 곳만 볼 수밖에 없다'고 이미 들어서 분위기만 느끼는 게 목적이었다. 평양 도착 다음 날 아침에 '배가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호텔에 남았다. 아침 10시쯤 빠져나와 시내를 돌아다녔다. 한 상점에 들어갔지만 '어디서 왔나? 여기 있으면 안 되니 호텔에 같이 가자'는 관리원들에게 이끌려 호텔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다시 나와 전차를 타보고는 내려서 아파트 단지로 갔다. 거기서 다시 잡혔다. 평양에는 신고 체제가 돼있어 외국인이 혼자 돌아다닐 수 없음을 알게 됐다."

    그는 1997년 조선족 여행객으로 위장해 함경북도 나진에 들어갔다. 일행인 조선족들이 그의 말투를 듣고는 '너 서울서 왔지?'라고 물었다. 북한 감시원이 들을까봐 조마조마했다. 이틀 뒤 중국으로 다시 나올 때 북한 보위부 직원이 다가와 귓속말로 '반갑수다. 또 만납시다'라고 말할 때는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신변 위협을 무릅쓰고 이렇게까지 북한 취재를 했던 이유는 뭔가, 정의감인가?

    "정의감에 앞서 실상을 알고 싶었다. 정보의 핵심에 더 가까이 가려는 게 기자의 욕심이 아닐까. 중국에서 만난 탈북자들을 통해 북한 참상을 들었다. 숱한 주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고, 세계에서 통제가 가장 심한 나라에서 이렇게 대량 난민이 발생하고 있는데,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무너지고 있는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다음 해 그는 또 나진에 갔다. 이번에는 북한 식량 지원을 위한 일본 민간단체의 모니터링 담당 직원 신분이었다.

    "중국에서 쌀 230t을 사서 철도로 부친 뒤 일주일쯤 지나 들어갔다. 나진에서는 안내 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장마당을 가보니 꽃제비들로 득시글거렸다. 내가 빵을 사서 꽃제비들에게 나눠주려고 하자 서로 많이 갖겠다고 싸움판이 벌어졌다. 출국할 때 작년에 귓속말을 했던 그 보위부 직원과 다시 마주쳤다. 너무 섬뜩했다. 북한에서 3주간 체류하면서 외국인으로서 많은 걸 봤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는 정보의 핵심에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정도로도 북한의 실상이 어떻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았나?

    "일시적으로 가서 보고 느낀 것은 주관적인 인상에 불과하다. 세상을 납득시키려면 영상·사진·문서 같은 '증거력'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1998년 옌지(延吉)의 아파트에서 함께 지내던 탈북자가 '비디오카메라를 달라. 내가 찍어 올게'라고 했다. 그는 원산에 들어가 장마당 모습을 찍어왔다. KBS를 통해 세계 최초로 꽃제비 동영상이 공개됐고, 다음 날 한국의 모든 신문이 사설로 다뤘다. 일본과 영국, 미국에도 보도됐다. 나는 운동권 출신이지만 운동권적인 해석이 필요 없었다. 팩트(사실)가 모든 걸 말했다."

    그는 북한 주민들이 기자가 되어 직접 취재하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을 했다. 이에 동의한 탈북자들에게 촬영 장비 작동법과 취재 기법, 윤리를 가르쳤다. 2008년 북한 내부 저널리즘의 출현과 성장을 지원한다는 취지로 격월간지 '림진강'도 창간했다. 이 잡지는 그 뒤 경영상 문제 등으로 중단됐고, 현재는 일본어판만 부정기적으로 발행된다.

    ―당신과 연락하는 북한 내부 협력자는?

    "10명쯤이다. 이들이 직업의식을 갖도록 정기적으로 보수를 송금해준다."

    ―당신의 수입원은?

    "영상과 사진 사용료, 원고료, 광고료, 출연료, 강연료 등으로 팀을 끌어간다. 경제적으로 힘들지만 '조선 반도를 알아가는 그런 인생을 살겠다'는 것은 젊은 시절부터 꿈이었다. 북한 취재에 목숨을 걸고는 못 했지만 내 인생을 걸고는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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