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여덟 번 약속 깬 뒤의 아홉 번째 약속

입력 2018.03.15 03:15 | 수정 2018.03.15 06:54

25년간 北은 "핵 개발 없다"고 8번 약속하고도 모조리 어겨
核을 종교로 여기는 '김씨 왕조'… 심리전 아닌지 경계 늦출 수 없어

김광일 논설위원·TV조선 '신통방통' 진행
김광일 논설위원·TV조선 '신통방통' 진행
1992년부터 북한은 8번 약속했다. "핵개발 안 한다"고 네 번 했다. 그러다 현장을 들키면, 영어식 표현으로 '핵 쿠키 단지에 손을 넣었다 걸리면', 이미 만든 것을 폐기하겠다고 네 번 약속했다. 도합 8번 다짐했는데, 전부 다 어겼다. 8대0이다. 지난 '3월 5일 합의'가 아홉 번째 약속이다. 8번 거짓말한 상대를 9번째 믿어보라는 건 이성적 설득이 아니다. 북한 문제를 24년 다뤄온, CIA 분석관 출신 브루스 클링너의 지적이다.

그러나 여덟에 여덟을 곱한 예순네 번이라도 속아줄 수 있다. 핵폐기 약속만 완벽·검증 가능·불가역적 세 가지로 이행한다면, 과거 일은 덮고 넘어갈 수 있다. 저들은 툭하면 '정의의 보검'을 휘둘러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하더니 올봄 '매력 공세(charm offensive)'로 돌아섰다. 북한에 여러 번 속아온 안보 전문가들이 요즘 많이 쓰는 표현이다.

김정은은 남쪽 특사단을 맞이한 조선노동당사 저녁밥 자리에 처와 누이동생을 데리고 나왔고, '정상회담' '비핵화' 같은 '달달한' 표현이 나중에 공개됐다. 이런 '매력 공세'를 워싱턴에서는 "되풀이 틀고 있는 영화"라고 했다. 너무 많이 봐서 이젠 눈 감고 엔딩 크레디트를 외울 정도다. 돈 되는 경협 사업을 함께 해보자고 평양을 달래가며 한국은 정부·민간 모두 합해 여태껏 240번 서명했다. 그러나 북핵 개발을 늦추거나 말리는 데 모두 실패했다.

"북한을 움직이려면 코브라처럼 재빠르게 독이빨을 박아 넣기보다 비단뱀처럼 서서히 감아서 옥죄는 전략이 더 효과적"이라고 클링너는 말했다. '맥시멈 압박'이 먹힌다는 뜻이다. "지난 10년을 합한 것보다 올해 더 많은 대북 제재를 했다"고 므누신 미 재무장관이 말했다. 돈줄을 틀어쥔 결과 올 10월이면 북한 외화 보유고가 바닥난다고 우리 국회 정보위원장도 보고했다.

상황은 여전히 수상쩍다. 3월 5일 이후 북한이 조용하다. 김정은이 특사단을 맞이한 사진 10장을 노동신문 1, 2면을 털어 도배했던 흥분상태 이후로 평양 매체가 일주일 넘게 입을 다물고 있다. "심리전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침묵이 계속되고 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분석했다. 평창에서 "김정은의 누이가 겨울올핌픽 쇼를 훔쳐갔다" "'북한의 이방카'가 한국 국민을 사로잡았다"던 미 언론도 이젠 답답한 눈치다.

협상은 아직 '시작의 시작'도 아니다. 평양이 지난 '3·5 합의'를 '북핵 폐기'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였다면서 남쪽에 먼저 미 핵우산과 미 전략자산의 기동력을 포기하라고 요구한다면 대화는 어그러진다. 5월 회담은 단판 승부 성격을 띤다. 트럼프도 이젠 코브라 전략 병행이다. 중간선거를 노린 미 국내용이라 하더라도 성과가 있길 바란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한다. 북 김씨 왕조 유훈은 두 가지다. 하나는 '한반도 비핵화'다. 이건 주한미군 철수로 연결된다. 다른 유훈은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김정은은 지난 5일 앞엣것만 말했다. 어느 전문가는 "한·미에 핵이 전략 무기라면 북한에 핵은 차라리 종교에 가깝다"고 했다. 김정은은 다른 모든 걸 떠나 핵보유 당사국으로서 미국과 마주 앉는다는 목표 달성이 가시권에 들어왔다고만 생각할 것이다.

봄이다. 주말부터 남도 매화축제가 열린다. 4월, 5월 남북·미북 정상회담 뉴스는 한반도에 진짜 봄소식일지 가짜 봄일지 경계심을 늦출 수가 없다. 북쪽 제비는 8번이나 가짜 봄소식을 물고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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