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은 왜 지금 '러 출신' 英 망명자의 목숨을 노리나

입력 2018.03.14 17:09 | 수정 2018.03.14 17:14

영국에서 러시아 출신 망명자의 죽음이 잇따르고 있다. 영국 가디언은 12일(현지 시각) 런던 남쪽 뉴몰든에서 러시아 출신 니콜라이 그루쉬코프가 사망한 채 발견됐다고 13일 보도했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이날 “러시아 이중스파이 출신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그의 딸이 지난 4일 영국의 한 쇼핑몰에서 괴한에 의해 독극물 공격을 받고 의식불명에 빠진 뒤 8일만에 그루쉬코프가 숨진 채 발견돼 영국이 긴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영국 경찰 관계자는 “그루쉬코프의 사인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며, 두 사건 사이의 연계성을 발견하지는 못했다”고 밝힌 상태다.

미국과 영국에서 갑작스럽게 숨진 반푸틴 인사들. /조선DB
BBC는 지난 수년간 반푸틴 활동을 하다가 영국에서 의문사한 러시아인은 14명이며, 영국은 러시아를 배후로 지목하고 있다고 전했다. 러시아는 왜 지금 러시아 출신 영국 망명자들의 목숨을 노리는 걸까.

◇ 그루쉬코프, 푸틴 정적 절친…영국, 러시아에 ‘최후통첩’

그루쉬코프는 고(故) 보리스 베레좁스키의 친구로 알려져 있다. 베레좁스키는 언론·석유·항공사를 소유한 ‘올리가르히(러시아 신흥 재벌)’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政敵)이었다. 그는 푸틴이 2000년 대통령 취임 후 재벌 청산 작업을 벌이자 2001년 영국으로 망명한 뒤 반(反)푸틴 활동을 벌이다가 지난 2013년 3월 23일 자택 욕실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됐다.

그루쉬코프는 줄곧 베레좁스키의 죽음 배후에 푸틴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2013년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너무 많은 러시아 망명자들이 의문사를 당했다”며 “나는 보리스가 살해 당했다고 확신한다. 그는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

5년 뒤, 2018년 3월 12일 그루쉬코프도 죽음을 맞았다. 그루쉬코프의 죽음은 러시아 이중간첩 독살 시도를 둘러싼 영·러 간 갈등이 심화된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영국은 러시아가 스크리팔 부녀(父女) 테러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아울러 그루쉬코프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둘러싼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러시아 군 정보부에서 근무하며 영국 정보기관에 협조한 ‘이중 스파이’ 세르게이 스크리팔(왼쪽)과 그의 딸 율리아 스크리팔(오른쪽). /페이스북
영국은 이미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한 상태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지난 12일 의회에 출석해 “스크리팔 부녀의 몸에서 ‘노비촉(Novichok)’이라는 독극물이 발견됐다”며 “이는 1980년대 러시아에서 개발된 물질로, 러시아 정부가 직접 이를 사용했거나 제3자에게 넘어가도록 관리를 소홀히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메이 총리는 또 영국 주재 러시아 대사를 소환해 “13일 자정까지 신빙성 있는 답변을 내놓지 않으면 러시아가 영국 땅에서 불법적인 물리력을 행사한 사건으로 결론 내리고 광범위하게 대응하겠다”고 통보했다.

◇ 러시아, 모든 혐의 부인…왜 지금 망명자 목숨 노리나

러시아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오히려 영국이 이 사건을 빌미로 러시아에 어떠한 조치를 가한다면 강력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영국 주재 러시아 대사관은 “러시아에 대한 징벌적 조치를 취할 경우 어떤 위협에도 대응할 것이다. 영국은 이를 명심해야할 것”이라고 했다고 BBC는 전했다. 또 러시아 정부는 영국 대사를 소환해 “영국의 행동은 분명한 도발”이라며 “러시아 정부는 독극물 테러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테레사 메이(왼쪽) 영국 총리와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 /BBC
그렇다면 러시아, 푸틴은 왜 지금 영국에서 망명자들을 공격하는 걸까. 우선 현재 국제 무대에서 영국의 지위가 약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영국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이후 EU 국가들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상황이다. 러시아에 경제·정치적으로 광범위한 제재를 가하기 위해서는 유럽 동맹국들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CNN은 “영국은 동맹국의 도움이 절실한 상태지만, 유럽은 물론 미국과의 관계도 이전과 같지 않은 지금은 최악의 시기”라고 지적했다.

시기적으로는 당장 오는 18일 치뤄지는 러시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푸틴이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분석이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푸틴이 80% 안팎의 지지를 얻어 당선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CNN은 “대부분의 여론조사 결과 푸틴의 승리가 예상되지만, 그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는 이들을 주목하고 있을 것”이라며 “푸틴은 반역자에 암살을 시도해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공포를 조장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서방 국가들과 친화를 원하지 않는 러시아 정부의 매파 세력을 안심시키기 위한 메시지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뉴욕타임스(NYT)는 러시아가 영국의 대러시아 제재를 개의치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푸틴은 ‘반역자’가 언제, 어디에서도 안전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이어지길 원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 美·EU 등 국제사회, 영국 지지 의사 표명

국제사회는 러시아의 암살 시도에 경제 제재 등을 경고한 영국에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백악관은 13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메이 총리와 전화통화에서 적극 지원하겠다는 뜻을 전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통화에서 “러시아에 명확한 해명을 요구한 메이 총리의 의견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며 “미국은 가장 가까운 동맹국(영국)과 같은 편”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일부 외신은 러시아의 2016년 미 대선 개입 스캔들도 조속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를 신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 /조선DB
프랑스와 독일 등도 메이 총리와 연대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은 이날 메이 총리와 통화를 하고 영국에 연대의사를 밝혔다고 BBC는 전했다. 라르스 뢰케 라스무센 덴마크 총리는 언론 인터뷰에서 “평화로운 영국에서 화학무기가 사용된 것은 냉전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며 “동맹국들과 대응조치를 논의하겠다”고 했다.

EU도 메이 총리를 옹호했다. 프란스 팀머만스 EU 집행위 부위원장은 이날 유럽의회에서 전 유럽 국가에 영국에 전폭적인 연대를 밝힐 것을 요구했다. 더불어 책임자 규명과 처벌을 위해 EU 전체가 협력해야 한다고 했다.

◇ 영국 대러시아 제재 방안 관심…‘전쟁행위’ 간주 가능성도

영국 정부가 내놓을 수 있는 대러시아 제재 방안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CNN은 영국이 공격적인 것부터 더 광범위하고 상징적인 방안까지 다양한 옵션을 선택할 수 있다고 전했다.

가장 공격적인 제재는 러시아의 독극물 공격을 전쟁행위로 천명하고,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헌장 제5조(집단방위 조항)를 발동하는 것이다. 나토 헌장 제 5조는 회원국 중 한 나라가 침공당하면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대응한다는 내용이다. 미국이 지난 2001년 9·11 테러를 당한 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기 전 이 조항을 발동한 바 있다.

영국은 유엔(UN) 헌장 51조를 발동할 수도 있다. 51조는 자위권 행사에 한해 무력 위협이나 무력 행사의 예외를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영국은 대규모 러시아 정부의 사이버 공격과 가짜뉴스 유출에 대응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영국 주재 러시아 외교관 추방, 러시아 월드컵 불참, 영국 내 러시아 자산 동결, 영국 내 러시아 언론사 폐쇄, 러시아인 비자 발행 금지, 영국인의 러시아 방문 금지 조치 등이 거론되고 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강력 부인하고 있는 만큼 혐의를 입증하기 쉽지 않을 수 있다는 전망이 있다. 핵무기 보유국인 영국과 러시아간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위험한 사태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영국, 러시아 독극물 사건 관련 안보리 긴급회동 요청 뉴시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