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좋아하는 건 유사연애… 팬들과 연애 관계로 구축된 방탄 팬덤
저스틴 비버 꺾고 최초 빌보드 소셜 아티스트상 수상
신비주의가 통했던 때가 있었다. 중요하다 여겨지는 것들만을 공개하던 때가 있었다. 작품과 작품 사이가 공백으로 가득하던 때가 있었다. 피부색이 곧 수저의 색깔이었던 때가 있었다. 팝의 지난 역사였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방탄소년단이 걷고 있는 길은 그 역사의 주검 위에 깔려 있다.
이것은 일종의 연애다. 따지고 보면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건 일종의 유사연애와도 같지 않은가. 하지만 그 마지막 단계에 대부분 아이돌은 도착하지 못한다. ‘메시지’가 없기 때문이다. 극소수의 아이돌만이 성장곡선을 그리는 이유다. 훌륭한 싱어송라이터에겐 훌륭한 메시지가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가장 강고하게 결속될 수 있는, 연애 같은 관계로 구축된 방탄소년단과 그들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진군했다.
2016년 12월, 홍콩에서 열린 엠넷아시아뮤직어워드(MAMA)애 참석했을 때다. 난다긴다하는 한국 아이돌이 총집결했다. 현장의 인기를 양분한 건 엑소와 방탄소년단이었다. 어림잡아 80% 이상이 그들의 팬으로 보였다. 방탄소년단이 무대에 올라왔다.
그들이 공연을 시작하자마자 집중력이 순간 치솟았다. ‘피 땀 눈물’ ‘파이어’ 두 곡의 무대는 압도적이었다. K-팝 아이돌의 최고 무기가 군무란 건 익히 알려진 바였으나 방탄소년단의 그것은 그 수준을 뛰어넘는 레벨이었다. 속주 기타 장인들의 연주, 속사포 래퍼들의 혀 놀림을 볼 때와 비슷한 아드레날린이 무대에서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그로부터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은 싸이 이후 가장 세계 시장에서 성공한 K-팝 음악가가 됐다. 아이돌 관련 소식을 전하지 않는 뉴스에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출연이 전해졌다. 며칠 후, 나는 부장님급 아저씨들과의 자리에서 “너 방탄소년단이라고 들어봤어? 걔들이 왜 미국에서 그렇게 인기야?”라는 질문을 들어야 했다.
◇ 들어온 팬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가두리 양식장’ 작전
아무리 아이돌 팬층의 연령대가 다양해졌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10대 문화다. 특히 보이 그룹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들이 10대 문화에서 전 연령층을 커버하는 인지도를 쌓으려면, 즉 변방에서 출발하여 중원을 점령하려면 셋 중 하나의 코스를 거친다.
첫째, 메가 히트곡을 터뜨려서 음악계의 흐름을 바꿔 놓는 거다. 둘째, 예능프로에 출연해서 대박을 치는 거다. 마지막, ‘역수입’의 코스를 밟는 거다. 장르를 막론하고 해외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거두게 되면 국내에서의 평가가 확 올라가기 마련이다. 아이돌 음악이 국내에서도 K-팝이라 불리게 된 결정적 계기가 2011년 SM타운의 파리 공연 아니었던가. 한물간 가수 취급받던 싸이가 폭풍의 눈으로 떠오른 것도 알다시피 ‘강남스타일’의 빌보드 랠리 때문이었고.
방탄소년단 또한 역수입 코스를 밟았다. 그들은 애초에 해외 시장을 노리고 만들어진 팀은 아니다. K-팝이 내수를 넘어 수출 상품이 된 이후, 팀 기획 단계부터 상식이 된 외국인 멤버는 한 명도 없었다. 기획사인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도 비교적 신생이었던지라 해외 사업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들이 택한 것은 인터넷이었다.
음원 데뷔가 2013년 10월이었던 반면, 이미 2012년 말 블로그와 트위터를 개설하며 SNS 활동을 시작했다. TV에 출연하면 곧 유튜브에 출연 전 복도에서 안무를 연습하는 영상이 올라오고, 활동이 없을 시에는 멤버들의 자잘한 일상과 음악과 팬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들이 끊이지 않고 업데이트됐다. 방탄소년단은 그렇게 스스로 콘텐츠 생태계이자 플랫폼이 됐다. 일단 들어온 팬들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가두리 양식장을 구축했다.
방탄소년단이란 이름의 그물망에 들어오는 대부분의 경로는 그들의 화려한 군무다. 데뷔 초부터 이어진 절도 있고 현란한 안무는 칼군무에 집중한 2015년의 ‘쩔어’를 통해 온라인에 퍼지기 시작했다. 파티 사운드의 음악에 얹힌, 서구에서 볼 수 없는 그들의 안무는 유투브 사용자들의 반응을 끌어내기 최적이었다.
데뷔전부터 구축해온 자체 콘텐츠는 늪과 같았다. 다채롭고 지속적인 정보의 동시다발적 급양은 팬덤의 살을 찌웠다. 층을 넓혔다. 팬이 팬을 몰고 오고 함께 A.R.M.Y의 일원이 됐다. 팬덤 대부분을 차지할 10대, 20대가 공감할 수 있는 학교생활과 청년기의 심정을 그들이 직접 랩과 노래를 통해 표현한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 저스틴 비버 꺾고 SNS의 최고 팝스타가 된 게 요행이 아니다
2016년 이후 SNS 팔로워는 덧셈이 아니라 곱셈, 곱셈을 넘어 제곱으로 증가했다. 정규 2집
방탄소년단의 무대를 보는 객석의 반응은 ‘신기하다’ ‘낯설다’가 아니었다. 미국 팝의 중심으로 들어온 것에 대한 환대와 같은, 자연스러운 열광이었다. 지난해 2010년대 틴 팝을 대표하는 저스틴 비버를 꺾고 SNS의 최고 팝스타가 된 게 요행이 아니라는 증명서를 수여하는 의전이었다. 그 순간, 전 세계 팬덤이 동시에 들썩였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를 넘어, 말 그대로 전 세계라 표현할 수밖에 없는 SNS상에서의 반응은 바벨탑 이전의 세상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탈 언어적 현상이었다.
이 광대하고 강고한 연대의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그 답은 빨라야 차기작에서나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아직 패를 꺼내기는 섣부르다. 그들이 쓰고 있는 한국 대중음악 해외 진출 새역사는 이제 첫 장을 갓 마친 건지도 모른다.
◆ 김작가는 대중음악평론가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남들보다 좋아했다. 사회에 나와서 짧게 다른 일을 하면서도 음악과 연관된 삶을 살더니 자연스럽게 음악에 대해 쓰는 게 업이 됐다. 추상적인 음악을 구체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그 안에 담겨 있는 감수성을 끄집어 내는 걸 지향한다. 저서로는 음악 애호가로서의 삶을 그린 가 있으며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