男 "성범죄 기준 마련해달라"… 女 "펜스룰은 부당"

입력 2018.03.14 03:04

[직원들 쏟아지는 요구에 기업들 대책 마련 고심]

직장인들 게시판서 답변 주고받고 기업들은 구체적 예시 만들어 배포
성폭력 신고 핫라인 만든 곳도…
성폭력, 상황에 따라 판단 달라져 일단은 세세한 가이드라인 필요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하면서 기업들이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직원들이 "성폭력의 구체적 기준을 마련해 달라" "회식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것을 금지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 인사팀마다 "성폭력 기준을 똑 부러지게 마련하는 게 쉽지 않다"며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한 건설사 인사팀은 지난주 '사내 성폭력 특별히 주의하라'는 이메일을 보냈다가 질문 폭탄에 시달렸다. "회식 때 남녀 직원을 섞어 앉혀도 되느냐" "같이 출장 갈 일이 있는데 승용차에 같이 타도 되냐"는 식이었다. 이 회사 사내 성폭력 교육 담당자(34)는 "기존에 문제가 되지 않던 부분도 하나하나 짚어달라고 하니 난감한 상황"이라며 "우리도 여기저기서 자문하고 있지만 상황마다 성폭력인지 아닌지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일반화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펜스 룰(여성과 아예 함께하는 자리를 만들지 않는 것)'도 논란이다. 7년 차 대기업의 한 여성 대리는 며칠 전 부장으로부터 단체 메시지를 받았다. '앞으로 가능한 한 저녁 회식을 하지 않겠다. 여직원과는 점심때만 단체로 만나겠다'는 것이었다. 이 직원은 "여성 저녁 회식 배제는 성차별 아니냐"고 인사팀에 문의했다. 담당자는 "아직 기준을 못 정했다, 난감하다"고 답했다.

기업 익명게시판에도 성폭력 기준을 마련해 달라는 글들이 계속 올라온다. 국내 한 대기업 계열사 익명게시판에 지난 9일 한 여직원이 '회식 자리에서 상사가 술에 취해 돌아가면서 직원들 깍지를 꼈다. 인사팀에선 남녀 구분 없이 한 것이라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자체적으로 기준을 정하자는 직장인들도 있다. 20~30대가 모이는 직장인 익명게시판에는 구체적으로 사례를 올리면 서로 답변을 해준다. '어제저녁 회식자리에서 옆 사람한테 술 한 잔 달라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후배 여직원이었다, 이것도 성희롱인가?' '괜찮아 보이는 여직원에게 밥 한번 먹자고 문자를 보냈는데 성희롱인가?' 등 글이 쏟아진다.

아예 구체적 기준들을 만드는 기업들도 있다. 한 대기업 인사팀은 지난 7일 상황별로 자세한 예시를 만들어 전 직원에게 배포했다. '다이어트해야겠다, 예뻐진 것 같다'는 말은 성희롱, '회식 때 러브샷' '악수 이외 어깨를 두드리거나 과도한 포옹'은 성추행이 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이었다. 수원의 한 중견 제조업체는 성폭력 관련 핫라인을 만들었다. 걱정이 되거나 의심이 갈 때 해당 번호로 전화하면 법무팀 직원 한 명이 전담으로 답변해준다.

구체적 기준을 만드는 것이 오히려 문제를 키울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성폭력 여부는 상황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실제 성희롱을 하고도 "회사의 성폭력 기준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탁틴내일 성문화센터의 이현숙 대표는 성희롱은 상대와의 관계, 말투 등 복합적인 맥락을 봐야 하기 때문에 가이드라인은 참고용으로 사용돼야 한다"고 말했다.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장미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상황별 가이드라인을 전부 만들어 대처하긴 힘들지만 전문가가 아닌 사람은 가이드라인조차 없으면 더 헷갈리지 않겠냐"며 "이런 가이드라인을 점차 늘려 빈 곳을 채우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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