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스케치·장난감 모아 '우주'를 그린 미술계 이단아

조선일보
  • 변희원 기자
    입력 2018.03.14 03:04

    [제30회 이중섭미술賞 김을]

    주얼리 디자이너서 화가로 전업… 그림 안 팔려 막노동·목수 경험도
    망치·톱·인형 동원해 드로잉 개척 "생각 자유롭게 표현한 게 최고죠"

    목수로 일했던 김을이 나무를 깎아 만든 자신의 모습. 작가를 상징하는 붓과 망치, 눈물이 보인다.
    목수로 일했던 김을이 나무를 깎아 만든 자신의 모습. 작가를 상징하는 붓과 망치, 눈물이 보인다. /장련성 객원기자
    선반에는 오래된 인형에서 떼어낸 머리 수십 개가 막대기에 접붙여 있다. 흰색 해골, 금색 해골이 산더미처럼 쌓인 인형 사이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망치, 니퍼, 펜치, 송곳도 보인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실험실 혹은, 공포 영화에 나오는 인형 가게 같은 이곳은 화가 김을(64)의 용인 작업실. 김을은 '그림 그리는 해골' 작품을 손바닥에 올려놓고는 "평생 그림을 그리다 죽을 나"라고 했다.

    20년간 매일같이 10점 이상의 드로잉 작업을 내놓는다. 그에게 드로잉은 밑그림이나 선으로만 이뤄진 평면 작업이 아니다. 스케치나 페인팅은 물론이고, 인형이나 장난감 같은 잡동사니를 이용해서 만든 조형물이나 낙서처럼 쓴 글귀, 미니어처로 지은 작업실 등이 모두 드로잉이다. 김을은 "한국서 드로잉은 회화의 부수적인 작업이나 2류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내게 드로잉은 형식이 아니라 태도다. 머릿속에 담긴 것을 그때그때 자유롭게 표현하는 태도다"라고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그린 김을은 원광대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한 뒤 5년간 주얼리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림 그리는 것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뒤 1988년 화가로 전업했다. 첫 5년간 자화상에 매달렸고, 다시 5년간 고향인 전남 고흥 종가를 주제로 '혈류도' 작업을 했다. 그는 "주제를 정해놓고 그렸더니 얽매이게 됐다"고 했다. "한 인간이 내면에 갖고 있는 게 얼마나 많아요. 근데 10년간 고작 두 가지 주제 갖고 작업을 하니까 억울하고도 비경제적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다 가짜 같고 의미 없어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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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전시 때 선보인 ‘갤럭시’. 스케치, 페인팅, 글씨 등 드로잉 1450점을 은하수의 형태로 배치한 작품이다. 드로잉 한 점은 김을이 세상과 부딪혀 폭발할 때 생겨난 ‘별’을 표현하고 있다. 갤럭시는 김을의 작은 우주이자, 거대한 자화상이다. /김을

    1997년 경기도 광주에 있던 작업실에 불이 났다. 자화상 300여 점과 혈류도 대부분이 불에 탔다. 김을은 "속이 후련했다"며 "그제서야 내 몸, 내 머릿속에 있는 모든 걸 꺼내서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모든 작품을 잃은 뒤 드로잉으로 새 출발했다. 2001년부터 1년에 1000점 이상 드로잉을 그리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주제는 없다. 생각나는 것을 그때그때 붓으로 칠하거나 망치로 두드려 만든다.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오늘의 작가상 후보에 올랐을 때 전시한 '갤럭시'는 그의 작품 세계를 응집해 보여줬다. 1450점 드로잉으로 이뤄진 이 거대한 작품은 공들여 그린 듯한 페인팅과 장난하듯 끼적인 스케치, 낙서들로 구성돼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드로잉은 김을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혈류이며 그의 육체를 움직이는 연료"라고 표현했다.

    김을은 미술계에서 '비주류'에 가깝다. 일주일에 한 번 대학에 출강하는 것 외엔 학교와도 인연이 없고, 특정 그룹에 매여 있지도 않다. 술을 즐기지도 않고 취미 생활도 없다. 아침 일곱 시 반에 일어나면 9시쯤 작업실로 간다. 텃밭을 잠깐 돌보는 것 외엔 잠들기 전까지 작업을 한다. 그림이 안 팔려 1994년부터 막노동을 시작했다가 목수까지 섭렵했던 10여년은 밤에 작업을 했다. 덕분에 지금 사는 용인 집과 작업실을 직접 지었고, 드로잉에 망치와 톱, 송곳 같은 연장을 동원하게 됐다.

    최근 드로잉 중 하나는 작업실을 본뜬 미니어처 건물을 짓는 것이다. 손바닥 크기부터 15평 넓이까지 다양한 형태로, 건물 안에는 인형이나 장난감을 해체해서 만든 조형물이 있다. 그는 이 작업실을 '트와일라잇 존(Twilight Zone)'이라고 부른다. "작업을 하면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사이에 있다고 느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작품이 장난 같다고요? 제 모토가 '생각은 깊게, 그림은 대충'입니다. 저는 미술 작품이 과대평가됐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작품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죠. 제 경험, 제 생각, 제 느낌을 자유롭게 다 드러내는 게 저에겐 최고의 작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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