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의 '뉴스 저격'] '265년 권력' 막부체제 깨면서도 인재는 중용… 사무라이 특권은 버렸다

입력 2018.03.14 03:12 | 수정 2018.03.14 08:34

[오늘의 주제: 메이지유신 150주년… 한·중·일 가운데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비결]

日 유신세력, 막부와 완력 정면충돌 회피… 실력있는 학자·외교관 활용해 봉건 해체
200만명 이르던 무사계급 기득권 없애 혁명적 사회 변혁에도 불만세력 잠재워
희생자 3만명… 프랑스 혁명의 30분의 1

1868년 1월 3일 존왕양이(尊王攘夷·왕을 높이고 오랭캐를 물리침)를 주장하는 무사(武士·사무라이)들이 교토(京都)의 궁궐 출입문 9곳을 모두 에워싼 가운데 궁 안에서 '왕정복고 대호령(王政復古大號令)'이 선포됐다.

265년간 일본을 지배한 도쿠가와 막부(幕府) 폐지와 메이지덴노(明治天皇)의 직접 통치를 선언한 왕정복고 쿠데타였다. 이어 4월 6일, 메이지 정부의 국시(國是)를 천명하는 '5개조 서문(誓文)'이 교토에서 반포됐다. 지금부터 150년 전 일이다. 조선의 갑오개혁과 중국의 양무운동, 일본의 메이지유신 가운데 메이지유신만이 유일하게 자체적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이유는 뭘까.

◇막부 해체했지만, 막부 人材들 중용

도쿠가와 막부는 1853년 흑선(黑船)을 몰고 온 미국 페리 제독의 무력시위에 굴복해 쇄국을 풀고 이듬해 미국·프랑스 등 서양 5국과 화친조약을 맺었다. 막부의 허약한 체질이 드러나자 기존 체제에서 출셋길이 막혔던 하급 무사들, 그리고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에서 도요토미 가문 편에 섰다가 패한 뒤 중앙 정치에서 배제됐던 사쓰마번(현재 가고시마현)·조슈번(현재 야마구치현) 등이 덴노를 앞세워 막부 타도에 나섰다.

유신 주도 세력에게 막부는 반드시 청산해야 할 '적폐'였다. 하지만 봉건적 막번(幕藩) 체제만 해체했을 뿐, 옛 정권의 씨를 말리는 인적 청산은 최대한 피했다. 오히려 막부 출신 학자·외교관·군인을 대거 등용했다. 메이지 정부군이 막부 토벌에 나섰던 1868년 당시 에도(江戶·지금의 도쿄) 인구는 약 100만명이었다. 막부와 완력으로 정면충돌했다면 엄청난 희생이 불가피했다.

메이지유신 시기 주요 연표

실제로 반(反)막부군의 총대장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막부의 육군 총재 가쓰 가이슈와 담판을 벌여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막부 측에 속한 다이묘(大名)·신하들의 생존을 보장하고 에도성에 무혈(無血) 입성했다. 메이지 신정부는 약속을 지켰다. 요시노부에게 공작 작위와 훈장을 수여했고, 가쓰를 해군 대신, 추밀원 고문 등에 기용했다. 가쓰 곁에서 협상을 도운 오쿠보 이치오, 야마오카 데쓰타로는 각각 도쿄부 지사와 자작 작위를 받았다. 유신 이후 도쿠가와 종가(宗家)를 물려받은 이에사토는 훗날 총리직까지 제안받았다.

막부의 해군 제독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홋카이도 하코다테에 에조시마(蝦夷島) 정부를 수립하고 끝까지 저항했다. 일종의 '대역죄(大逆罪)' 행위였다. 그러나 이듬해 항복하자, 정부는 2년 만에 그를 석방해주고 홋카이도 개척 사업 전권을 맡겼다. 에노모토는 이후 해군 중장, 외무·체신·농상무 대신 등을 지내며 메이지 정부에 충성했다.

에노모토의 부하로 정부군에 대항할 요새 오릉곽의 설계·건설을 맡았던 다케다 아야사부로는 새 정부의 육군 대좌, 육사 교수로 등용됐다. 막부가 키워낸 유학생·외교관도 적극 활용했다. 막부 시절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 개정을 요구하고 선진 문물 견학을 위해 서구 12국에 보낸 107명 규모의 이와쿠라 사절단(1871년 12월~1873년 9월)에도 이들을 동행하게 했다.

◇3만여 명만 희생… 러시아 혁명때는 1000만여 명

유신은 무사 계급이 사실상 자기를 부정하며 단행한 체제 변혁이다. 개혁 과정에서 200만명에 이르는 무사 중 상당수가 사회 밑바닥으로 추락해 '지배계급의 자살'이란 평가를 받는다.

다이묘가 토지와 백성을 정부에 반납한 판적봉환(版籍奉還·1869), 번을 폐지하고 정부 직할 현을 두는 폐번치현(廢藩置縣·1871), 천민 계급을 없애는 신분 해방령(1871), 무사에게만 열려 있던 군대 문호를 평민에게도 개방한 징병령(1873), 무사에게 지급하던 봉록·급여를 중단한 질록처분(1876)과 도검 휴대를 금지한 폐도령(廢刀令·1876) 등 사족(士族)이 누려온 특권을 스스로 포기했다.

'유신 10걸(傑)' 중 군정(軍政) 개혁을 추진한 오무라 마스지로, 오쿠보 도시미치 등 4명이 이 과정에서 분노한 무사들 손에 암살당했고, 마에바라 잇세이 등 2명은 유신의 향방을 놓고 대립하다가 처형됐다.

반막부군 총대장이던 사이고 다카모리도 1877년 세이난(西南) 전쟁을 일으켰다가 반란의 수괴라는 오명을 쓰고 자결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는 사이고를 12년 뒤 복권해 주고 도쿄 우에노 공원에 동상을 세워 불만 세력을 달랬다. 이런 노력으로 혁명적 사회변혁을 추진하면서도 희생자를 3만명 정도로 최소화했다. 프랑스혁명 때는 50만~100만명, 러시아혁명 때는 1000만명 넘게 죽었다.

※참고한 책: ‘메이지라는 시대’(도널드 킨)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박훈) ‘조용한 혁명’(성희엽) ‘해군의 탄생과 근대 일본’(박영준) ‘일본, 군비 확장의 역사’(야마다 아키라)

[전문기자의 '뉴스 저격'] '黑船 충격' 후 군함 늘리기 올인… 1904년에는 세계 열강수준 도달 김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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