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의 '뉴스 저격'] '黑船 충격' 후 군함 늘리기 올인… 1904년에는 세계 열강수준 도달

조선일보
  • 김태훈 기자
    입력 2018.03.14 03:11

    [오늘의 주제: 메이지유신 150주년… 한·중·일 가운데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비결]
    日해군력, 메이지 부국강병의 상징

    페리 함대의 출현 당시 일본엔 100t 규모의 배도 없었다. 반면 페리 선단의 기함 서스캐나는 대포로 무장한 철제 증기선으로 무게만 2450t이었다. 막부와 각 번이 해군력 증강에 나선 배경이다.

    막부는 1864년 고베(神戶)에 해군 훈련소를 세웠다. 해군 유학생을 파견하고 군함 확보도 서둘러 메이지유신 직전엔 군함 9척과 운송선 등 총 44척을 갖췄다. 전국의 번들도 개항 후 왕정복고 직전까지 함선 94척을 확보했다.

    메이지유신 당시 1등급 함(전함·순양함)이 전무(全無)했지만 러일전쟁(1904) 때는 러시아와 같은 14척을 보유한 해양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박영준 국방대 안보대학원 교수는 "19세기 해군의 위력은 21세기 핵무기와 같아 국가의 대외 정책 목적을 달성하는 유효한 수단이었다"고 했다.

    해군력 강화는 다이쇼(大正·1912~1926) 시대에도 계승돼 1920년 완성된 전함 나가토(長門)는 당시 세계에서 유일하게 16인치 포(8문)를 탑재했다. 일본 해군은 워싱턴군축회의(1921~1922)에서 주력함의 총톤수가 영국·미국의 60%로 제한되며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1930년 런던군축회의 결과에 반발한 해군은 항공대 강화에 나서 1931년(만주사변) 360대, 1937년(중일전쟁) 1000대, 1940년(태평양전쟁 직전) 2200대로 폭주했다. 근대 일본의 해군력 강화는 메이지유신의 핵심 모토인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성취사였다. 그러나 쇼와(昭和·1926~1989) 시대 들면서 군국주의로 흘러 결국 패망을 맞았다.

    사무라이 특권 버린 日, 유일하게 자체 근대화 성공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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