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214] 색채만 남긴 로스코의 그림

조선일보
  •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입력 2018.03.13 03:10 | 수정 2018.03.13 03:50

    마크 로스코, 61번(적갈색과 청색), 1953년, 캔버스에 유채, 292.7x233.8㎝,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 소장.
    마크 로스코, 61번(적갈색과 청색), 1953년, 캔버스에 유채, 292.7x233.8㎝,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 소장.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태인이었던 마크 로스코(Mark Rothko·1903~ 1970)는 어린 시절, 전쟁을 피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했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양차 대전을 목격했던 로스코는 그 시절의 다른 많은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니체와 무의식, 그리고 원시적인 신화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신(神)과 이성(理性), 문명을 거부하는 것만이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르는 참혹한 폭력과 무자비한 광기를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로스코는 그림으로 황폐한 현대인의 영혼을 채워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치열하게 경합하던 그 시절에는 무엇을 그리든 정치가 됐다. 편협한 정치적 메시지에 갇히지 않기 위해 그는 그림으로부터 이미지를 제거하고 오직 색채만 남겼다.

    작품의 제목에도 무의미한 숫자를 붙였을 뿐이다. 로스코는 길이 3m에 달하는 큰 캔버스에 색을 칠하고 또 칠하는 지난(至難)한 과정 속에서 그가 느꼈던 영적 해탈을 보는 이들도 경험하길 원했다. 따라서 그는 45㎝, 즉 손을 뻗으면 바로 화면에 닿을 수 있고, 눈앞에는 미묘하게 겹쳐 있는 색면(色面)만이 가득 차는 거리를 두고 작품을 감상하라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술관에서는 그의 그림에 가까이 가자마자 요란한 경고음이 울릴 것이다. 수백억원을 호가하는 그의 작품에 티끌만 한 흠집이라도 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로스코를 알고 나면, 오렌지색 새벽이 어두운 밤하늘을 열고 퍼져 나가는 모습, 검푸른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초저녁의 수평선, 그리고 회색 하늘 아래 두껍게 깔린 지독한 황사마저도 모두 그의 그림처럼 보인다. 화가가 바랐던 대로, 황폐한 현대인의 영혼이 조금이라도 채워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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