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사회] '5년 정부' 따라 춤추는 과학기술

조선일보
  • 박상욱 서울대 교수·과학정책
    입력 2018.03.13 03:13 | 수정 2018.03.13 03:49

    연구개발비 세계 5위, 특허 4위… IT·전통 산업서 한국 경쟁력 갖춰
    他國 성공 사례 그만 베끼고 우리 시스템으로 본보기 될 때

    박상욱 서울대 교수·과학정책
    박상욱 서울대 교수·과학정책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과학기술 강대국이며, 이를 깊이 인식해 이에 걸맞은 전략과 정책을 펼치고 국제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듣기 불편한 주장일 수 있다. 일본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수십년 동안 뛰어 왔지만 중국의 매서운 추격세에 자다가도 눈이 번쩍 떠지는 요즘이니 말이다. 1990년대에 처음 나돈 '샌드위치 위기론'에 이어 최근에 '신(新)샌드위치 위기론'이 반향을 얻고 있다. 구미 선진국들이 100여 년 축적한 과학기술 역량은 아직 우리에게 없는데, 공간의 규모로 축적시간을 압축하는 중국에 추월당하기 시작했다는 조바심에서다. 위기론은 매력적이다. 위기를 벗어나려는 안간힘은 성장의 동력이 되고, 위기론은 공공 자원 투입 확대에 당위성도 부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위기론을 곡해하고 프레임을 오용할 때 생긴다. 건강한 사람에게 독(毒)한 약을 쓰면 오히려 병이 나는 법이다. 마음의 여유를 잃고 단기 처방에 급급하면 체질을 개선하고 미래를 위해 투자할 귀중한 시기를 놓칠 수도 있다.

    한국은 분명히 세계적인 과학기술 강대국이다. 필자가 2000년대 초 세계 각국의 과학기술 경쟁력을 강·중·약으로, 연구개발 활동 규모를 대·중·소로 분류해 본 적이 있다. 여러 지표를 사용해 국가혁신 시스템의 순위를 매겼더니 이미 한국은 최상위권이었다. 당시에는 핀란드를 모델로 한 '강중국형 전략'이 유행이었는데, 맞지 않는 옷이었다. 지금의 한국은 그때보다 더 강하고 더 커졌다.

    실제로 우리의 연구개발(R&D) 총투자액은 세계 5위다. 미국, 중국, 일본, 독일보다 작고 미국과 비교해서는 10분의 1 수준이다. 하지만 우리보다 경제 규모가 1.7배나 큰 프랑스, 1.6배인 영국보다 R&D 투자액이 많은 게 엄연한 사실이다. 미국과 일본·유럽특허청에 접수된 것을 합산한 국제특허 건수는 우리나라가 미국, 일본, 독일에 이어 세계 4위다. 이공계 주요 분야의 SCI 논문수는 10위 이내이다. IT와 전통산업 분야 양쪽에서 한국만큼 국제경쟁력을 갖춘 나라는 드물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이 과학기술 강대국에 걸맞은 행보를 보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일례로 노무현 정부가 도입한 국가혁신 시스템 관점은 유럽 학자들이 1970년대 일본의 과학기술 혁신체계를 연구해 만든 개념이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는 이스라엘의 창업생태계를 벤치마킹했다. 문재인 정부의 4차 산업혁명은 독일의 '인더스트리4.0'에서 비롯해 스위스 다보스 포럼의 클라우스 슈바프가 주창한 것이다.

    세계는 한국의 시스템과 전략을 궁금해하는데, 정작 우리는 남의 개념을 수입하고 베끼기 바쁘다. 그게 무언지 알 만하면 정권이 바뀌고 슬로건이 또 바뀐다. 한국 특유의 성공 공식은 제법 된다. 온 국민이 글로벌 혁신 트렌드에 민감하며, 대기업들이 안주하지 않고 도전하는 게 대표적이다. 민관(民官)이 합심해 결정하면 무서운 추진력으로 나아간다. '빠른 2등(fast second) 전략' 수행에서 한국을 따라올 나라는 없다.

    아쉬운 것은 국가 전략의 부재다. 이제 한국은 과학기술 강대국으로서 세계 과학기술 혁신정책을 선도하며 길을 제시하고 타국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갈 길이 멀고 바쁘니 기초연구는 선진국들의 몫이라는 식은 곤란하다. 과학기술 강대국으로서 인류의 진보에 기여하고 범지구적 문제 해결과 개발협력 등에서 국제적 책무를 이행해야 한다. 이것은 과학기술 기초체력 강화와 영향력 확대, 그리고 미래 성장 동력이란 보답으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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