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 열풍의 주역, 43년전 시작점에 다시 서다

입력 2018.03.12 03:03 | 수정 2018.03.12 10:54

한국 단색화 물꼬 터준 '흰색전', 43년 만에 도쿄화랑서 다시 열려
박서보·권영우·서승원 등 5人 "작가의 세월 느낄 수 있어"

"한마디로 白色(백색)은 스스로를 具顯(구현)하는 모든 可能性(가능성)의 生成(생성)의 마당이다. …우리의 畵家(화가)들에게 있어 白色모노코롬은 차라리 세계를 받아들이는 비전의 제시다."

1975년 5월 20일 자 조선일보는 미술평론가 이일의 글을 빌려 일본 도쿄화랑에서 열린 '흰색(Hinsek)'전에 대해 이렇게 보도했다. 전시 주제는 '한국 5인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 고(故) 권영우(1926~2013), 박서보(87), 서승원(77), 허황(72), 고 이동엽(1946~2013)이 주인공이었다. 이 전시는 일본 아사히신문이 그해 '가장 주목할 전시 톱5'에 꼽았을 정도로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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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서승원, 허황(왼쪽부터)이 9일 일본 도쿄화랑에서 개막한 ‘흰색전’을 찾았다. 1975년 도쿄화랑에서 열린 ‘다섯 가지의 흰색전’은 한국 단색화를 국제적으로 알린 첫 전시였다. 사진에 없는 권영우, 이동엽 작가는 세상을 떠났다. /변희원 기자

한국 단색화를 해외에 처음 알린 흰색전이 도쿄화랑에서 43년 만에 다시 열린다. 9일 개막식에 참석한 박서보는 "한국 미술을 해외에서 알아주지 않았던 70년대에도 나는 우리 작품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걸 해외에 처음 알린 것이 도쿄 전시였다"고 했다. 케이트 림 아트플랫폼아시아 대표는 "'흰색전'은 한국 단색화의 첫 물꼬를 터준 국제 전시였다"고 했다.

그 후 40년이 지나 단색화는 세계 화단에서 이슈가 됐다. 권영우와 박서보는 201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열린 '단색화' 특별전에 소개됐고, 지난해 5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박서보의 흰색 묘법 시리즈는 14억7000만원에 낙찰됐다.

도쿄화랑 설립자이자 흰색전을 기획한 고(故) 야마모토 다카시는 70년대부터 한국을 자주 찾았다. 이우환이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1972년 '앵데팡당' 전시에서 권영우와 이동엽이 그린 흰색 그림을 보고 감동했다. 그 후 흰색을 표현한 한국 작가들을 찾아내 1975년 흰색전을 열었다. '흰색' 전으로 전시 제목을 지은 건 이우환(82)이다. 다카시의 둘째 아들이자 도쿄화랑 디렉터인 다바다 유키히토는 "조선백자를 아끼신 아버지는 한국 작가들이 표현한 흰색이 도자기와 비슷하다고 여겼다"며 "단색화가 지금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 매우 기뻐할 것"이라고 했다.

전시 규모는 단출하다. 1975년에 출품했던 작품 한 점씩과 최근 작품 한 점씩, 총 10점으로 구성됐다. 박서보는 "작가의 과거와 현재가 한데 있어 그간의 세월을 느낄 수 있는 자리"라고 했다. 연필로 수많은 선을 그은 박서보의 '묘법'은 최근작에서 선에 깊은 층을 만들어 입체감을 형성했다. 차갑고 이지적인 기하 추상을 선보였던 서승원 작품은 형태와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따뜻해졌다. 구겨진 흰색 베개를 그리면서 연필 가루를 비벼 넣거나 묽은 흰색 물감을 여러 차례 칠했던 허황은 돌가루 풀어 넣은 물감을 사용해 새로운 흰색을 표현했다. 서승원은 "흰색은 한국 정신의 정체성을 생각하게 한다"고, 허황은 "흰색이란 만들 때마다 달라서 새로운 색이 나올 땐 전율을 느낀다"고 했다.

1975년 박서보는 40대, 서승원과 허황은 30대 청년이었다. 허황은 "40여 년 만에 이 자리를 찾으니 가난하고 힘들게 작품 활동했던 시절과 먼저 세상을 떠난 권영우, 이동엽 작가를 돌아보게 된다"고 했다. 그러자 대뜸 서승원이 제안했다. "박서보 선생이 100세 되는 해, 우리 이 자리에서 흰색전을 다시 한번 여는 거 어때요? 그때도 신작을 하나씩 갖고 오기로 합시다." 4월 28일까지, www.tokyogalle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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