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펜스 룰'은 답이 아니다

입력 2018.03.12 03:13

유소연 사회정책부 기자
유소연 사회정책부 기자

몇 년 전 출입처와 기자단 회식 자리에서 한 검사가 여자 기자 몇 명을 끌어안으려 하는 추태를 부렸다. 항의가 들어오자 다음 날 그는 일일이 전화를 돌려 사죄했다. 지난 7일 그가 검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 개업을 한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제 발 저려서?"라는 생각이 스쳤다.

최근 한 문화예술계 인사가 내놓으려던 작품 발표를 보류하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요즘 같은 때 혹시 모르니 몸 사려야 한다"는 이유에서라고 했다. 그의 가까운 동료 몇 명은 최근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며칠 전 한 남자 교수에게 취재 자문을 하려고 연락했더니 "미투 때문에 부담스럽다"며 응하지 않았다.

성폭력 폭로가 잇따르는 가운데 일부 남성은 '미투' 눈치 보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간 여성 인권에 얼마나 무심했는지 자성(自省)하기보다 "나도 운(運) 나쁘면 걸릴지 모른다"는 억울함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느끼는 불안감의 강도는 그동안 누려온 '젠더(gender·性) 권력'의 크기에 비례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잃을 게 많은 이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빌미를 주지 않겠다는 명분으로 회식, 출장 등에서 여자 직원들을 배제하는 현상이 번지고 있다. 이른바 '펜스 룰'이다. 여자 직원을 성적 대상이 아닌 '동료'로서 대하는 태도를 그동안 알지 못했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여성을 일터에서 배제해 남성중심적 사회 구조를 더 공고하게 만드는, 시대착오적 대응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펜스 룰'에 대한 일부 직장 남성들의 반응은 마치 해답을 찾은 듯 의기양양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무고한 남자들의 생존법'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이들은 직장에서 '남녀칠세부동석' 하면 손해 보는 쪽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다. '펜스 룰'을 외칠수록 일터에서 권력이 남성에게 쏠려있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뿐이다. 우리나라 여성 임원 비율은 2.7%(매출 상위 500대 기업 기준). '펜스 룰'은 직장 내 인사권자 대다수가 여성이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해법이다.

이런 우리 사회의 민낯을 직시해야 한다. 성범죄 가해자에 대한 단죄 외에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는 여럿이다. 먼저 우리 사회의 척박한 '젠더 감수성'을 개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 문제에서 내가 방관자가 되지는 않았는지, 나도 모르게 2차 가해를 한 적은 없었는지, 성차별적 구조에서 누린 특혜는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노래방 금지' '회식 금지' 같은 일과성 처방에만 빠져있는 건 우리 사회가 성숙해질 기회를 저버리는 것이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