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안희정의 몰락은 너무도 아프다

조선일보
  • 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입력 2018.03.10 03:07

    '새 정치' 희망이던 安 지사, 성폭행 폭로로 순식간 몰락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꼴… 음모說·여론戰 발 못 붙여
    국민적 기대 산산조각 내… 황우석 사태와 닮은 꼴

    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안희정 전(前) 충남도지사의 여비서 성(性)폭행 사건과 그로 인한 몰락은 너무도 충격적이다. 한 주일 내내 온 국민이 이에 따른 허탈감과 분노에 휩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충남 지역민들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학회 일을 상의하려 충남의 한 학회 동료 교수와 통화를 하며 이 얘기를 꺼냈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 얘기는 하지 맙시다."

    자신의 불길한 앞날을 예견했던 것일까? 2016년에 나온 그의 저서 '콜라보네이션'에는 직접 쓴 글씨체로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오욕칠정(五慾七情)의 수많은 거미줄 앞에 자빠지고 무너진다. 이 모든 일이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어 빚어지는 일이건만 문지방에 발가락 걸리듯이 부딪히고 자빠진다.' 하지만 자신이 실제로 이처럼 순식간에 '자빠지고 무너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사태는 안희정을 지지했던 많은 이의 마음에 오래도록 깊고 아픈 상처(트라우마·trauma)로 남을 것이다. 안희정이 누구인가.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 캠프의 자금 관리 책임을 단독으로 짊어진 채 1년간 옥고를 치르고, 참여정부에서 어떠한 공직도 맡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을 때 그의 모습은 너무도 맑고 눈부셨다. 속칭 '운빨'로 권력을 잡은 그렇고 그런 친노(親盧) 핵심 멤버 중 하나인 줄 알았던 그의 모습이 필자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이후 2008년 통합민주당 최고위원 선출, 2010년 충남 도지사 당선, 2014년 재선 성공 등 정치적 승승장구가 이어졌다. 그가 도지사 자리에 머무를 것으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 답답하고 퇴행적인 정책 파행이 거듭되고 적폐 청산을 명분 삼은 보복의 정치가 점입가경 양상을 보일수록 협치(協治)를 앞세워 이념, 지역, 세대를 아우르는 그의 리더십은 돋보였다. 그는 새 정치의 희망이었다.

    김지은 전 수행비서의 고발은 이처럼 완전체와 같던 안희정의 모든 것을 단숨에 산산이 깨뜨렸다. 심리학의 고전적인 인지(認知) 부조화 이론에 따르면 이러한 충격적 사태 앞에 사람들이 보이는 일차적 반응은 충격적 팩트(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일종의 충격 완화 기제이다. 하지만 안희정 사태에서 이런 기제는 아예 작동하지 못했다. 방송을 통한 김 전 비서의 성폭력 고발은 날벼락처럼 무방비 상태의 국민을 직타했다. 그녀의 처연한 말과 표정에 거짓과 과장이 섞이지 않았음은 누구에게든 분명했고, 팩트 공방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태에 대응하는 또 다른 방법은 팩트를 인정하더라도 그 중요성을 희석시키거나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여론전(戰)을 펴는 것이다. 시사평론가 김어준이 제기한 '미투 운동 음모설'이 그 전형이다. 하지만 거대한 태풍처럼 전 사회를 휘몰아치고 있는 '미투 운동'이 이 가능성 역시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그 결과 안희정은 손 써볼 겨를도 없이 한순간에 몰락(沒落)했다.

    안희정 사태는 여러 면에서 2005년의 황우석 사태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우리 국민은 인류애를 실현하는 '위대한 줄기세포 연구의 꿈' '과학적 연구 윤리' '연구 부정행위' 사이에서 거대한 인지 부조화의 충격을 경험했다. 사태 발생 직후의 즉각적 반응은 황우석의 연구 부정(不正)행위에 대한 팩트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팩트가 굳어진 후에도 열성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문제가 일부 있다고 황우석을 이렇게 상처 내야 하는가'라는 여론전이 이어졌다. 결국 황우석은 내쳐졌고,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국민적 열정도 차갑게 식어버렸다.

    안희정 사태에서 이런 일련의 일들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속수무책 상황으로 진전되고 있다. 추가적인 피해자가 나타났고, 8일 오후 예정됐던 그의 사과 기자회견은 두 시간 전쯤에 전격 취소되었다. 그는 9일 오후 5시 서울 서부지검에 자진 출석해 미안하다는 짧은 말을 남기고 검찰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도 허망한 끝이었다.

    이념·진영·파당·지역으로 갈라지고 근시안적 당리당략과 정치 보복으로 얼룩진 후진 정치를 '협치'와 '탈이념의 정치' '합리성의 정치'로 탈바꿈시키려던 안희정표 '새 정치'의 꿈 역시 속절없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우리 정치의 한계가 여기까지인가 싶다. 그가 선도했던 정치 개혁의 꿈을 열렬히 지지했던 한 사람으로서 안희정의 몰락은 너무도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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