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자기 한 몸 부끄러워져도 梨花 지킨 그녀… 돌 던질 수 있을까

조선일보
  •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8.03.10 03:02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16>김활란(1899~1970)

    김활란
    이철원 기자
    독일의 저명한 역사철학자 랑케는 역사 연구의 원칙을 '사실을 사실대로'라는 한마디로 요약했다. 사실을 모르고 역사를 말하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다. 인촌 김성수가 누구이며, 우월 김활란이 누구인가를 사실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의 증언이 필요한데 그들이 살아 있다 해도 나이가 100세에 가까워졌기 때문에 말할 기력도 없고 글 쓸 기운도 없다.

    김활란의 조상은 평안북도 의주에서 오래 살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인천으로 이주해 사업을 시작한 까닭으로 김활란은 인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곱 살에 어머니 박도라 여사와 함께 인천 내리교회에서 어느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 선교사가 본디 두 여성에게 주기로 작정했던 세례명을 실수로 바꿔 부른 탓에 마땅히 박헬렌이 돼야 할 그의 어머니는 '박도라'라는 세례명을 받게 됐고, 그는 어머니가 받아야 할 세례명 헬렌을 받게 돼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닥터 헬렌 킴이 된 것이다.

    이화여대 졸업생 한 사람이 1960년대 하버드대의 유명한 총장 네이선 퓨지(Nathan Pusey)를 그의 집무실에서 만나게 됐다. 그 졸업생이 이화여대 출신인 것을 알고 퓨지는 "닥터 헬렌 킴은 잘 계신가요"라고 물었다. 매우 놀라 "총장께서는 어떻게 대한민국의 김활란 박사를 아십니까"라고 되물었더니 퓨지가 대답하기를 "그 어른은 대한민국의 여성 지도자일 뿐 아니라 전 세계 여성의 지도자이십니다"고 한마디 하는 바람에 이 졸업생이 크게 감동하였다고 한다. 등잔 밑이 어두울 수도 있다.

    김활란은 인천 내리교회에 다니면서 영화학당에 입학했다. 그 뒤에 한성(서울)으로 이사를 가 거기서 새로 세워진 이화학당에 전입해 초등부·중등부·고등부를 다 마치고 1914년 대학부에 입학해 4년 뒤 졸업할 때 우리말과 영어로 유창하게 졸업 연설을 했다고 한다. 언제나 반에서는 1등이고 피아노와 노래에도 소질이 있어 훨씬 뒤의 일이긴 하지만 1927년 월남 이상재 선생의 사회장 영결식에서 추모 노래를 독창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성악을 하고 싶었지만 어려서 폐를 앓아 호흡이 짧아 성악가의 길을 가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학생 때 어느 부흥회에서 기도하는 중에 '너는 이 나라의 여성들을 빛 가운데로 인도하라'는 하늘의 명령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오하이오 웨슬리언에 편입학해 학사 학위를 받고 보스턴대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받아 귀국해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이후 컬럼비아대로 가 '한국의 부흥을 위한 농촌 교육'이라는 박사 학위 논문을 써 1931년 최초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한국 여성이 됐다.

    그때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그날까지 김활란의 최대 관심은 한국 여성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전국적으로 전도 활동도 많이 했고, 계몽 활동에도 정성을 다했다. 조선총독부는 미국과의 관계가 순조롭지 못한 것을 빌미로 전국에 미국 선교사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기 시작해 부득불 김활란은 이화여전의 교장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이화는 조선총독부의 탄압에 직면했다. 전시 체제를 구축해 나가던 총독부 입장에서는 이화여전도, 김활란도 안중에 없었다. 김활란은 이화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학생들을 인솔하고 조선 신궁에 참배해야 했고, 시키는 대로 강연도 다녀야 했고, 글도 써야 했다. 1941년 진주만을 폭격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한 군국주의 일본은 미국 선교사들이 창설한 이화여전을 폐교하려 했지만 김활란이 이화를 지키기 위해 자기 한 몸을 불사른 것이다.

    그에게 있어 그 시기야말로 암울하기 짝이 없는 세월이었다. 내 한 몸을 살리기 위해 이화를 희생의 제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내 한 몸이 어떤 부끄러움을 당하더라도 이화를 끝까지 지킬 것인가 그는 기로에 서 있었고 이화의 책임자로서 이화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눈물로 기도하면서 그 어두운 세월을 이겨낸 것이다. 김활란과 그 시대를 함께 살았던 교직원들과 학생들은 알고 있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일반 조선인도 알고 있었다. 김활란의 심중(心中)이 어떠했겠는가. 그는 그 시대 우리 모두의 존경 대상이었다.

    드디어 해방이 됐고 해외에서 활약하던 독립투사들이 다 함께 조국에 돌아왔다. 그들은 이 모든 시련을 극복한 오척 단신의 여걸을 향해 '일본인들 때문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나요'라며 악수를 청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를 위해 장례식은 하지 말고 나를 하늘나라에 보내는 환송 예배를 해다오." 역사가의 임무는 과거에 일어난 일들과 이미 살고 간 사람들을 보다 합리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화여대 캠퍼스에 서 있는 김활란의 동상이 그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젊은이들에 의해 페인트로 더럽혀지고 모욕으로 매도될 수는 없다. 역사의 미래에 어느 날 김활란의 신앙과 애국심은 공정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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