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전설적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1989년 아칸소주 리틀록시(市)에 집회를 이끌러 갔다. 아칸소주지사였던 빌 클린턴 아내 힐러리가 목사를 점심에 초대했다. "여성과 사적(私的)인 점심식사는 안 합니다." 그레이엄은 서른 무렵 "아내 이외 여자와 단둘이 여행하거나 만나거나 식사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성적(性的) 타락이 신앙을 망치는 주범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식당 한가운데서 식사하면 되잖아요?" 힐러리의 끈질긴 설득에 목사는 물러섰다. 지난달 세상을 뜬 그레이엄 목사는 힐러리와의 지적인 대화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자서전에 썼다.

▶'빌리 그레이엄 룰'은 지난해 미국 정가(政街)에서 화제가 됐다. 워싱턴포스트가 펜스 부통령 아내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 펜스가 아내 외에 딴 여성과 단둘이 식사를 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펜스 부통령은 스스로를 기독교인·보수주의자·공화당원 순(順)으로 규정할 만큼 독실한 신자다. '펜스 룰'이 보도되자 논쟁이 벌어졌다. 시대착오적 여성관이라는 비난과 도덕적이라는 칭찬이 엇갈렸다.

▶'미투 운동'이 불붙자 '펜스 룰'이 주목받고 있다. 성희롱을 막는다며 회식·출장에서 여성을 제외하는 분위기가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여직원에게 말 안 섞고 톡으로 지시…'란 제목의 그제 본지 기사엔 4만개 넘는 댓글이 달렸다. '남자들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 아닐까' '남녀칠세부동석이 부활하겠네' 같은 말들이 이어졌다.

▶'남녀칠세부동석'은 '예기(禮記)'에 나온다. '여섯 살 되면 숫자와 방향을 가르치고, 일곱 살 되면 남녀 자리를 같이하지 않으며, 여덟 살엔 소학에 들어간다'는 대목이다. 정민 한양대 교수는 이 구절을 남녀가 일곱 살이 되면 '같은 자리에 앉지 않는다'가 아니라 '한 이불에 잠재우지 않는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남녀유별(男女有別)을 강조하다 보니 함께 있는 것도 안 된다고 오해했다는 것이다.

▶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는 최근 '(펜스 룰은) 여성들이 직장에서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줄어들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성과 합석하는 자리를 원천 봉쇄해야 미투 논란에서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고 위험이 있으니 차를 아예 타지 않겠다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여성을 피하기보다는 동료로, 선후배로 서로 인격을 존중하는 직장 분위기를 만드는 게 출발선이다. 어제가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