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서 또 '러시아 스파이' 독살 악몽… 배후는 푸틴?

조선일보
  • 노석조 기자
    입력 2018.03.07 03:03

    MI6에 정보 넘긴 스크리팔 위독… '모르핀 200배' 펜타닐에 당한 듯
    독극물 든 녹차 마시고 숨진 2006년 리트비넨코 사건과 비슷

    러시아 군 정보부에서 근무하며 영국 정보기관에 협조한‘이중 스파이’세르게이 스크리팔이 2004년 러시아 당국에 체포된 모습(위).
    러시아 군 정보부에서 근무하며 영국 정보기관에 협조한‘이중 스파이’세르게이 스크리팔이 2004년 러시아 당국에 체포된 모습(위). 아래는 2006년 11월 방사능 독극물 테러를 당하고 머리카락과 눈썹이 모두 빠진 채 입원해 있는 전 러시아 스파이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로이터 연합뉴스·더타임스
    지난 4일(현지 시각) 오후 4시 영국 남부 소도시 솔즈베리 한 쇼핑몰 앞 벤치에서 남녀 한 쌍이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됐다. 둘은 팔다리가 축 늘어진 채 벤치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있었다.

    15분 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현장에서 남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10여년 전까지 러시아 군 정보부에서 근무하며 몰래 영국 국외첩보부 MI6에 협조한 '이중 스파이' 세르게이 스크리팔(66) 대령이었다. 여자(33)는 그의 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위중한 상태다.

    스크리팔은 1995년 군 정보부 요원으로 유럽에서 근무하다 MI6에 포섭돼 이중 스파이가 됐다. 그는 MI6 관계자와 접선할 때 주로 루이뷔통 가방을 들고 나가 '루이뷔통 스파이'로 불렸다. 스크리팔은 2004년 MI6에 러시아 정보기관 인물들 신상을 넘겼다가 러시아 당국에 체포돼 징역 1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2010년 미국과 러시아 간 스파이 맞교환 때 풀려나 영국으로 건너왔다.

    경찰은 "스크리팔은 정체불명의 물질에 중독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일간 솔즈베리 저널은 의료진을 인용해 "누군가 스크리팔 몸에 마약류 진통제인 '펜타닐(fentanyl)'을 주입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고 보도했다. 펜타닐은 효력이 모르핀의 200배, 헤로인의 100배다. 소량 복용만으로도 심한 환각 증상을 겪다가 사망할 수 있어 암살용으로 쓰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크리팔이 의식을 잃기 전 모습을 본 한 여성은 BBC 인터뷰에서 "그가 벤치에 앉아 팔을 허공에 힘없이 휘젓고 하늘을 멍하게 바라보는 등 이상한 행동을 했다"고 전했다.

    2010년 그와 맞교환돼 러시아로 돌아간 여자 스파이 중에 안나 챔프만이 있었다. 챔프만은 러시아 복귀 후 스파이 생활을 청산하고 모델 겸 방송인으로 활동했다. 패션 사업도 성공해 '백만장자 스파이'로도 불린다. 스크리팔이 쓰러진 이날 그는 태국 해변에서 활짝 웃으며 비키니를 입고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려 스크리팔의 운명과 극적으로 대비됐다.

    BBC는 "스크리팔 사건은 2006년 전직 러시아 연방보안국(FSB·KGB의 후신)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의 암살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고 전했다.

    리트비넨코는 1998년 FSB 근무 시절 반(反)정부 성향의 기업인을 암살하라는 임무를 거부하고 비판했다가 1년간 징역형을 살았다. 출소 후 그는 영국으로 망명했다. 영국에서 러시아 비판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그는 2006년 11월 돌연 눈썹과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고 시름시름 앓다 사망했다. 조사 결과 한 달 전 그가 런던 호텔에서 옛 FSB 동료를 만나 마신 녹차 속에 방사성 독극물 '폴로늄(polonium)'이 들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폴로늄은 독성이 청산가리의 2억5000만배로 '초소형 핵폭탄'이라 불린다. 당시 리트비넨코를 독살한 안드레이 루고보이는 이후 러시아 하원 의원이 됐다.

    데일리메일은 전문가들을 인용해 "푸틴 대통령이 최근 리트비넨코를 암살한 안드레이 루고보이 의원을 '국가적 영웅'이라고 치켜세우고 명예훈장을 준 점은 이번 스크리팔 사건이 러시아 정부의 소행일 가능성을 높여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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