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한국민은 북핵 인질에서 벗어나는 건가, 또 속는 건가

조선일보
입력 2018.03.07 03:20

남북이 4월 말 판문점 남측 구역인 평화의 집에서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고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6일 밝혔다. 대북 특사로 김정은을 만나고 돌아온 정 실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북측은 북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북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고 말했다. 이어 "북측은 비핵화 문제 협의 및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해 미국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용의를 표명했다"고 했다. 남북은 또 정상 간 핫라인을 설치키로 했다. 북은 대화 기간 핵·미사일 도발을 중단하고, 핵무기는 물론 재래식 무기를 남측을 향해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확약했다고 한다.

이 합의에는 평가할 부분이 적지 않다. 김정은이 정상회담 장소를 판문점 남측 지역으로 받아들인 것은 상징적 차원의 의미가 없지 않다. 김정은은 한미 훈련과 관련해 4월에 예년 수준으로 진행하는 것을 이해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역시 전례가 드문 것이다. 남북 정상이 언제든 전화기를 들고 대화하는 시스템을 마련한 것도 오해에서 빚어질 수 있는 충돌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 북이 핵을 포기할 의사가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김정은이 말한 비핵화의 전제 조건인 '군사 위협 해소'와 '체제 안전 보장'은 만약 그것이 '미·북 수교'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북이 핵을 포기해 미국·일본과 국교를 맺고 하루빨리 국제사회의 정상적 일원으로 나오는 것은 온 민족이 바라는 일이다. 그러나 북은 수십만 주민을 굶겨 죽이고 경제를 황폐화시키는 대가를 감수하고 핵을 개발해 왔다. 그걸 포기한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다. 실제 북한 보도기관들은 이번 합의 후에도 '비핵화'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이런 북의 비핵화 언급엔 진심이 조금이라도 담겨 있는가.

'군사 위협이 해소되고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것은 북한이 핵 개발 사실이 외부에 알려졌던 1990년대부터 해왔던 말이다. 북은 '군사 위협 해소'와 '체제 안전 보장'을 '평화체제'라는 명분 아래 한미동맹 파기와 주한미군 철수의 동의어로 사용해 왔다.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이 발표한 '정부 대변인 성명'은 비핵화의 전제로 주한미군 철수를 분명히 하고 있다. 김정은은 한국이 주한미군 철수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실현 불가능한 조건을 내거는 것은 핵을 포기할 뜻이 없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이 합의를 마치 비핵화에 큰 진전이나 있는 듯 발표하고 있다. 과거에 적어도 문면상으로는 이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합의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2005년 9·19 합의에서 북은 심지어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약속하기도 했다. 그래놓고 불과 1년만에 첫 핵실험을 저질렀다. 당시 9·19 합의문을 다시 읽어보면 아직까지 북한 비핵화가 안 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다. 모든 것은 속임수였다. 이번에 김정은이 밝혔다는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라는 것도 김정일이 국제사회를 기만할 때 써먹던 어구다.

청와대는 북이 미국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용의를 표명했다고 했지만 이 역시 앞뒤 맥락이 빠져 있다. 정부는 평창올림픽 당시 김여정과 김영철이 방문했을 때도 "북한이 미국과 대화할 뜻이 있다고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제로는 '핵보유국 지위를 갖고 미국과 대화하겠다'는 것이 북한의 언급이었다. 북이 이번에도 핵보유국으로서 인정받은 상황에서 한미동맹 폐기 및 주한미군 철수와 자신들의 핵 폐기를 맞바꾸자고 나오는 것이라면 결국 핵무력 완성의 시간을 벌자는 것일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17일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하지만 마음이 급한 것 같다"며 "우리 속담으로 하면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이라고 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은 당시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미·북 비핵화 대화'를 제시했다. 정부는 곧 대미 특사단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내 미·북 대화를 설득할 것이다.

김정은의 이 정도 수사로 미국이 대화에 나설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현재 우리 정부의 태도가 문 대통령 언급과는 정반대로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것 같다. 지금 급한 쪽은 우리가 아니라 김정은이다. 김정은은 김정일과 달리 남측 특사단을 기다리게 하는 쇼를 하지 않았다. 신변 공포를 무릅쓰고 판문점 남측까지 오겠다고 했다. '진지한 대우를 받고 싶다'고까지 했다 한다. 궁지에 몰린 것이다. 대북 제재가 이대로 이어지면 결국 체제 위협이 되고, 미국이 실제 군사 공격을 해오면 과정이 어떻든 결과는 자신의 몰락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지금은 심각한 위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북핵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때 우리 정부가 조급증에 빠져서 원칙을 버리면 자칫하면 김정은에게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주게 된다. 우리 정부가 핵무장을 완성하고자 하는 김정은의 방패막이가 돼주는 일은 결코 있어선 안 된다.

일단 공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미국 정부가 탐색적 차원이라도 미·북 대화에 나서게 되면 김정은은 미국의 공격 압박에서 벗어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대북 제재를 이완시키려 나설 것이다. 북이 핵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는 가운데 이런 국면이 이어지면 한국민과 국제사회는 또 한 번 북에 속아 넘어가게 된다. 이번에 그 결과는 핵무장의 완성이다.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다. 만약 미·북이 '북핵 사실상 인정'과 '북 ICBM 포기'를 맞바꾸게 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우리 국민에게 최악의 상황이다.

북한과는 수많은 합의가 있었다. 그때마다 우리 정부는 '마침내 평화의 길이 열렸다'는 식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국민 앞에 닥친 것은 핵과 미사일이다. 이번 합의로 한국이 북핵 인질에서 벗어나는 길이 마침내 열릴 것인지, 아니면 지난 25년간 그랬던 것처럼 또 한 번 북의 기만전술에 말려들 것인지는 국민에 달려 있다. 5100만 한국민이 눈을 부릅뜨고 가짜와 진짜를 가려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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