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철의 스틸라이프] “밤에 먹을 갈면 좋아요” 두부를 닮은 두부 연적

  • 장우철 사진가
    입력 2018.03.13 07:00 | 수정 2018.04.03 07:41


    돌멩이, 솔방울, 그리고 두부를 닮은 연적 하나… 내 책상 위의 천사들
    “밤에 먹을 갈면 좋아요… 어떤 방향제보다도.”
    붓도 벼루도 없이 작고 흰 연적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나날


    새로 산 두부연적과 슈프림 양말, 2018년 봄/사진=장우철

    강원 산간에 눈이 온다는 뉴스를 무슨 승전보처럼 듣는다. 나는 그 길로 차를 몰아 인제에 갔다. 전화는
    가면서 했다. “오늘이 삼일절이라서, 혹시 영업을 안 하시면 어쩌나 해서 전화드려요. 그리고 두부를 사갈 수 있을까요? 두 모 정도.” 인제군 상남면은 양지바른 고장이다. 두 번을 갔는데 여러 해 여러 번 간 것처럼 볕이 고르게 닿았다.

    내린천 얼음은 더러 녹아서 커다란 구멍이 났다. TV 뉴스 한 토막에 ‘봄이 오는 소리’ 같은 제목을 달고 나올법한 영상이 거기서 졸졸 라이브중이었다. 그리고 정오가 가까웠을 때 마침내 상 위로 두부가 나왔다. 오늘 새벽에 만든 두부. 두부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두부. 이렇게나 부드러운 네모.

    두부는 나와 친하다. 어려서부터 우리집은 두부와 친했다. 논산 취암동에서 간판 없는 구멍가게를 10여 년은 했으니, 롯데 해태 크라운 오리온 같은 과자 회사 이름은 물론 콩나물을 가져오시는 아저씨와 두부를 가져다 주시는 아저씨를 당연히 알고 지냈다. 두부는 노란 플라스틱 상자에 여러 모가 빼곡하게 채워져 왔다. 합동두부. 노랗고 낮은 상자에는 그렇게 써있었다. 급식이 없던 12년 내내 도시락 반찬으로 가장 많이 먹은 것은 두부조림.

    그러니 2007년쯤 창덕궁 담장 한편에 있던 우일요(우일요 매장은 2015년에 지금의 성북동으로 자리를 옮겼다)에서 “그건 두부 연적이에요”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빙그레 웃을 수 밖에 없었다. 홍시맛이 나서 홍시맛이 난다고 말하는 꼬마처럼, 두부처럼 생긴 연적은 과연 두부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걸 샀다. 붓도 벼루도 없이. 여기에 술을 담아 방울방울 마시면 그 또한 좋지 않을까 농인지 멋인지 마음대로 부리면서.


    우일요 두부연적. 꽈리 열매는 엄마의 밭에서 따온 것. 2014년 가을/사진=장우철

    그러고는 생각날 때마다 그것을 가지고 다녔다. 제 용도에 맞게 연적으로 쓴 것은 세 번인가 네 번인가 했지만, 무슨 행운의 구슬이나 열쇠고리처럼 주머니에 넣어 다닌 것은 서너 번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나는 그것을 애완했다. 꺼내어 어디에든 놓으면, 보면서 웃게 되었으니, 특히 로마에 그걸 가지고 갔을 때가 생각난다. 석상 밑, 분수 모서리, 계단 위, 나는 자주 꺼내고 자꾸 사진을 찍었다. 무슨 콘셉트 따위가 아니라 다만 여행지에서의 그런 시간이 소소하게도 알찼다.

    도쿄에서 벼루를 사고, 인사동에서 붓을 사는 날들이 드문드문 그 후로 이어졌다. “밤에 먹을 갈면좋아요.” 누군가에게는 추천하듯 그런 말도 했다. “어떤 방향제보다도 좋지요.” 무슨 21세기 한석봉을 꿈꾸는 건 아니었으나, 겨울밤에 ‘겨울 동’자를 수백 번 쓰는 일은 하릴없이 향기로웠다. 지금도 책상 위 마우스 옆으로는 벼루와 먹, 연적과 필가, 돌멩이와 솔방울 같은 것들이 놓여있다. 그런 것들이 전하는 그만큼의 평화. 내 책상 위의 천사들.
    우일요에 가면 접시와 사발과 찻잔이 우르르 먼저 반갑지만, 선반 한쪽에는 하얀 벼루와 연적과 필가가 있다. 나는 그걸 하나씩 사고, 하나씩 가지고 다니고, 그러다 하나씩 선물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연적 중에는 맹꽁이 모양을 한 것도 있었는데 언젠가 겨울에 황인찬 시인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의 첫 시집을 읽고 난 후, ‘흰색’에 대한 생각을 잇다가 생긴 일이었다.


    두부연적을 가지고 로마에 갔을 때. 2015년 여름/사진=장우철

    또 얼마 전에는 서울에서 드물도록 지혜로운 기획자인 김선경 씨에게(안동 ‘구름에 리조트’와 통의동 ‘일상다반사’가 그의 생각으로부터 자리를 잡았다.) 두부 연적을 선물했다. 설 선물. 백자와 같은 마음이라면 그 만한 복이 또 있을까 싶은 마음을 담아.

    어제, 볕이 별안간 녹아내려 캐시미어 목도리가 무색한 오후에 성북동 우일요에 다녀왔다. 다 누구 줘서 이제는 내게 없는 두부연적을 새로 하나 들일 생각에 들떠서는 가게 대문을 열었다. 우일요 대문은 나무대문이고 ‘입춘대길’과 ‘건양다경’ 새로 쓴 여덟 글자가 붙어있다. 절기로 입춘은 벌써 지났으나, 나는 오늘이야말로 봄의 시작이 아닌가 싶었다.

    이화동 집으로 돌아와 새로 산 두부 연적을 사진 찍었다. 곁에는 슈프림 양말을 말아 찌그러진 달항아리처럼 놓았다. 다만 호젓했다. 백자를 보면 늘 이렇다.



    ◆장우철은 한 잡지의 에디터로 15년을 보내다 한여름에 그만두고는 이런저런 일을 한다. 요새는 ‘DAZED KOREA’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HOUSE VISION SEOUL’의 에디터, ‘샌프란시스코마켓’의 라이터(이상 수입 순), 사진가 등으로 불리며 글쓰고, 사진 찍고, 인터뷰하고, 기획하고, 진행하고 그런다. 또한 해마다 초겨울이면 엄마가 짠 참기름과 들기름을 파는 기름장수가 되기도 한다. ‘여기와 거기’, ‘좋아서 웃었다’ 두 권의 책을 냈다. 몇 번인가 전시를 열었고, 서울과 논산을 오가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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