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우물 안 키재기 하는 '한국의 MIT' 대학들

조선일보
  • 안석배 논설위원
    입력 2018.03.06 03:15 | 수정 2018.03.06 21:07

    학령인구 30만명대 시대
    선거 때마다 대학 '뚝딱'… '한국의 MIT'가 벌써 6개
    어떻게 국제경쟁서 이기나

    안석배 논설위원
    안석배 논설위원
    1990년 서울 홍릉 카이스트(KAIST)에 홍콩인 일행이 방문했다. 과학 특성화 대학을 만들려고 하는데 한국에서 모델을 찾으려 했다. 석학(碩學)을 어떻게 초빙했고, 학교 운영은 어떻게 하는지 꼼꼼히 메모해 갔다. 이어 찾은 곳은 포항공대(포스텍)다. 이듬해 홍콩 청수만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홍콩과기대(HKUST)가 세워졌다. 무섭게 성장했다. 16년 후 한국 대학들은 이 대학을 찾아 '홍콩과기대 벤치마킹' 보고서를 작성한다.

    홍콩과기대가 세워진 그해, 말레이반도 최남단에는 난양공대(NTU)가 문을 열었다. 싱가포르 정부의 집중 지원을 받은 이 대학은 파격적인 스카우트 제도를 운영했다. 젊은 과학자들에게 8억여 원의 연구비를 주고 노벨상 심사위원장 출신을 총장으로 앉혔다. 40개국 학자들이 교수 하겠다고 이 대학에 지원서를 냈다. 지난해 조선일보·QS 아시아대학평가에서 난양공대는 아시아 1위로 올라섰다.

    두 대학이 단기간에 성장할 수 있었던 핵심 동력은 돈과 리더십이다. 난양공대가 한 해 굴리는 돈은 3조원에 이른다. 우리나라 4개 과학 특화 대학이 지난해 정부에서 받은 돈은 4500억원이다. 게다가 개교 27년의 두 '젊은 대학'을 이끈 총장이 지난해 말 기준 각각 3명뿐이었다. 평균 9년씩 재직하면서 총장들이 변화와 혁신을 주도했다. 1971년 개교한 카이스트는 지금까지 총장 평균 임기가 2.3년이다. 정권 따라, 장관 교체 때마다 총장 운명도 바뀌는 게 우리 현실이다. 대학 명암(明暗)이 엇갈리는 건 당연하다.

    중동이 오일 머니를 대학에 투자하기 시작한 게 10여 년 전부터다. 사우디아라비아는 2009년 킹 압둘라 과학기술대학교(KAUST)를 개교하면서 21조원을 쏟아부었다. 올해 우리나라 교육부 대학지원 예산(9조4900억원)의 2배가 넘는다. 엄청난 투자였다. 그 돈으로 미국 칼텍(캘리포니아 공대) 총장 등 거물을 스카우트하고 각국 학생을 모았다. 성장세가 무섭지만 이 대학의 여전한 고민은 국제적 인지도를 높이는 것이다. 명문 대학으로 이름을 올리기란 그렇게 어려운 일이다.

    한국에서는 그동안 '한국의 MIT'를 지향하는 대학이 하나 둘 늘었다. 카이스트·포항공대에 이어 광주과학기술원(1995년)·울산과학기술원(2009년)·대구경북과학기술원(2011년)이 개교했다. 선거 때 약속하면 새 대학이 태어났다. 이번 정부는 '한전공대'를 세우겠다고 했다. 세계 톱 수준의 에너지 특화 대학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2022년 개교한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금 광주·전남 지역에선 한전공대 유치전이 치열하다.

    한전은 지난해 4분기 1300억원 적자를 냈다. 정부가 탈(脫)원전을 내걸며 원전 가동률을 대폭 떨어트렸기 때문이다. 에너지 특화 대학이 되려면 원자핵공학과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국내 원자력학계는 지난해부터 의욕상실증에 걸려 있다. 지난 40여 년간 치열하게 연구해 세계 최고 수준이 됐는데 하루아침에 '없어져야 할 학문'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이런 불합리와 모순 속에 또 하나의 대학이 탄생한다.

    모두가 '한국의 MIT 대학'이 될 수는 없다. 누군가는 글로벌하게 경쟁하고 누군가는 산업 인력을 착실히 잘 키우면 된다. 너도나도 국가대표가 되겠다고 하는 순간, 나라의 고등교육도 추락하고 개인도 불행해진다. 선거판에 '한국의 MIT' 구호는 더 이상 안 나왔으면 좋겠다. 이제 곧 학령인구 30만명대 시대, 대학은 충분하고 넘친다. 때로는 합치고 융합해야 바깥세상과 경쟁할 저력(底力)을 키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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