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내가 못났다는 거요… 난 씩씩한 사람이 못 돼, 겁이 굉장히 많고"

조선일보
  •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18.03.05 03:06

    [시인 김지하 단독인터뷰]

    "영원한 진리 아닌 마르크시즘
    진보 혁신 떠드는 놈들이 100년 전 하던 얘기를 똑같이, 좀팽이 깡통 좌파로구나"

    "감옥에서 박정희 죽음 소식 교도관이 전해주는 순간
    '인생무상' '안녕히 가십시오' '나도 곧 뒤따라갑니다'…"

    시인 김지하와 통화를 한 것은 대규모 3·1절 집회를 열겠다는 보수 진영의 신문 광고 때문이었다. 주최 측 대표 명단에 '김지하' 이름이 들어 있었다.

    "내 목을 걸고 감옥에 간 게 '민주' 앞에 놓은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잖소. 개헌을 한다면서 민주주의 앞에 '자유'를 뺀다는 것에 좋지 않게 생각해. 그래서 내 이름을 넣어도 좋다고 한 것인데, 내가 보수의 리더인 것처럼 광고가 실렸다고 했소? 내 나이 칠십팔이오, 몸도 아픈 내가 지금 정치하게 됐소? 글도 시(詩)도 안 쓰고, 그림이나 그리며 원보 엄마(부인 김영주)만 모시고 사는데…."

    술 한 병 들고 강원도 원주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갔다.

    "술·담배 안 한 지 오래됐소. 당신도 꽤 늙었구먼. 우리가 얼굴 안 본 지 10년 됐나, 20년 됐나. 김대중 시절 당신 인터뷰로 그쪽 사람들에게 많이 시달렸지…."

    김지하는“사람 잡아 조지는 게 정치요? 할 말은 많아도 이젠 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김지하는“사람 잡아 조지는 게 정치요? 할 말은 많아도 이젠 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원주=최보식 기자
    ―보수 진영에서는 이런 난국에 김 선생께서 나와주셨으면 하더군요.

    "내가 어떻게 우파의 리더가 될 수 있겠소. 나는 우파도 좌파도 아니오. 중간파도 아니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걸 내 사명으로 하는 사람이오."

    ―새로운 길이라는 게?

    "한마디로 정의하고 얘기하는 게 힘이 들지만, 우리 전통 속에서 세계적인 보편성을 찾는 것이나 세상을 바꾸는 주체로 여성성(女性性)에 주목하는 것인데…."

    ―지금 현실의 긴박성과는 떨어진, 너무 추상적인 답변이군요.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신문기자처럼 말해야 하나, 정치가처럼 말해야 하나. 안 그렇지 않소? 그런 얘기 할 수 있으면 내가 왔다 갔다 하며 돈을 벌지. 나는 아름다울 미(美), 배울 학(學), 미학 전공이오. 예술의 원리와 효과에 관심 있고, 연극 연출, 그림, 시를 해왔잖아. 그렇게 해온 사람의 말이란 애매하고 어정쩡할 수밖에 없는 거지."

    ―제가 이해 못하면 독자도 이해를 못합니다. 현 정권이 가고 있는 방향은 맞는다고 봅니까?

    "이해를 안 하려고 하는 것이지. 현 정권이 모두 맞는다고 생각하면 당신을 이렇게 만나 떠들겠어. 간혹 어떨 때는 이 자식들 봐라, 마르크시즘은 영원한 진리도 아닌데, 그 자체가 변화·발전·진보하는 것인데, 100년 전에 하던 얘기를 똑같이 하나, 진보 혁신을 떠드는 놈들이 그걸 집착해, 좀팽이 깡통 좌파로구나 여기지. 그놈의 똘마니들이니까."

    ―'그놈'이 누구입니까?

    "신문 기사를 보니까 문재인 대통령이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에 감동받았다고 했더군. 내 인생의 책이라고 그랬나. 백낙청은 자칭 한국 문화계의 '원로'로 행세하고 있고…."

    ―리영희나 백낙청은 어려운 시절 함께했던 동지(同志) 아니었나요? 관계가 왜 이렇게 비틀어졌는지 궁금합니다. 지주(地主) 집안에 그 시절 하버드대 대학원을 나온 백낙청이 민중을 운운하는 이중성 때문인가요?

    "하버드대에서 영문학을 한 그가 어떻게 한국 문학사의 심판관을 해. 내가 장모(박경리)를 알기도 전에, 그는 박경리 소설 '시장과 전장'을 형편없이 깠어. 그런 심미관(審美觀)을 보고 그를 더 우습게 봤어. 리영희는 중국 문화대혁명과 월남전 타령이고, 외신(外信)에 나오는 걸로 자기 사상인 양 떠들었어. 1973년인가 신경림 시집 '농무(農舞)' 출판기념회에서 비위가 틀려 이들과 대판 싸웠어요. 그 뒤 한 선배가 '함께 안 가면 이 동네에서 당신이 외톨이 된다'고 말려 억지로 친해졌던 거지."

    ―5년 반 전쯤 본지(本紙) 기고문을 통해 이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깡통 좌파'라고 공격해 화제가 됐지요.

    "내가 감옥 독방에 갇혀 있었을 때 교도관을 통해 바깥과 연락했어요. 한번은 리영희·백낙청·고은이 함께하는 술자리에 교도관이 앉아 있었어요. 그 자리에서 고은이 '박경리에게 손자를 업고 시청 앞에서 김지하 석방 플래카드 들고 시위하라고 했더니 과부년 주제에 말을 안 들어. 하라고 하면 할 것이지'라고 떠벌리자, 리영희·백낙청이 낄낄 웃더라는 거야. 그 얘기를 교도관에게 전달받았소."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을 때 '역사와의 화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김지하가 이렇게 변절할 수가 있나'라는 당혹감도 있었습니다.

    "여성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소. 인류 역사의 변화가 감지됐어요. 동학에 의하면 후천(後天) 시대가 도래하고,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에는 우주가 여성성으로 바뀌며 그늘이 빛을 감싸게 되며, 천부경(天符經)에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구절이 나오고…."

    그의 설명이 십여 분 넘게 이어져, 중간에 말을 끊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박근혜 후보에 대해 '부모님이 흉탄에 돌아가셨고 18년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 내공이 있을 거다'라고 했지요?

    "제 아비로부터 정치를 배웠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친하게 지낸 선후배들이 찾아와 좋게 얘기를 하며 '박근혜를 한번 만나라'고 했어요. 내게 찾아오겠다는 전갈이 왔을 때, '지학순(池學淳) 주교의 무덤에 가서 정권 잡으면 유신 체제처럼 안 하겠다고 큰소리로 다짐하고 오라'고 하니까, 실제 그렇게 하고 찾아왔어요."

    ―그 전부터 알아온 게 아니라 그때 처음 봤다는 것이군요. 어떤 대화를 나눴습니까?

    "그의 아버지 얘기를 꺼냈어요. 감옥 독방에서 내가 미친 증세가 와서 100일간 참선을 했어요. 참선이 끝나는 바로 그날 박정희가 죽었어요. 교도관이 전해주는 순간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소. '인생무상' '안녕히 가십시오' '나도 곧 뒤따라갑니다'. 나처럼 박정희 미워한 사람 별로 없었을 텐데. 다음 날 교도소 TV를 통해 미사를 집전하는 김수환 추기경을 봤어요. 그분이 한참 침묵한 뒤 '인생무상'이라며 나와 똑같은 말을 하더군. 그때부터 내가 웃기 시작했어요."

    시인 김지하(오른쪽)
    ―이런 얘기를 들려주니까 박 후보는 어떻게 반응하던가요?

    "웃지도 울지도 않고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부모가 총 맞아 죽고 난 뒤 18년을 고독 속에서 지내면서 생긴 내공이 아닌가 싶더만. 그래서 내가 '당신을 잘 모르지만, 이런 고통을 에너지화해서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중요한 것은 문화인데 모든 것을 문화와 연결시켜 해주기 바란다'고 말했소."

    ―그렇게 평가했던 박 전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는데.

    "제 아버지에게 정치를 배웠으면 치밀한 정치 패거리가 있겠지, 그 패거리가 돕지 않겠는가 했는데. 그게 안 보였어. 임금처럼 만기친람이었어. 어디서 최순실이 같은 여자가 튀어나와 야단법석이 될 줄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어."

    ―구속 수감된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어떤 감상이 있습니까?

    "이명박도 구속시키려고 하지 않소. '적폐 청산'이 말은 그럴 듯하나, 정치가 사람 잡아 조지는 것인가. 그게 정치요? 할 말은 많아도 나는 이제 하지 않아."

    ―김 선생을 보면, 짧았던 젊은 날의 어떤 신념과 선택이 그 뒤의 길고 긴 세월을 모두 결정짓는 것 같습니다.

    "젊은 날 나는 정치(시국투쟁)를 할 생각이 없었소. 옆에서는 자꾸 하라고 했지만, 나는 그런 조직에는 안 들어갔지. 나는 시·연극·드라마 같은 문화에 관심이 있었소. 대학 시절 은사는 내게 '노자(老子)를 읽어라. 허무에서 배워라'고 했고, 또 '서양 미학을 배우는 대학원에 진학하지 말고 거리의 미학자가 되라'고 했소. 그런 괴상한 가르침을 받은 그대로 나는 시 쓰고 거리의 미학자가 된 거 아니오."

    ―'허무(虛無)'를 공부했다면서 어떻게 독재 정권과 맞서는 투사가 되고 저항 시인이 됐습니까?

    "우리 집안은 동학(東學)이었소. 전기기술자인 아버지는 자생적 공산주의자였소. 하지만 6·25 때 북한의 지령을 받는 진짜 공산주의 그룹에서 아버지 계열은 청산됐어. 그 뒤 자수하고 전기조명 기사로 국군에 편입됐어. 6·25가 끝나자, 공산주의자로 찍혔던 고향 목포에서 원주로 이사를 오게 된 거요. 내 나이 열세 살 때. 왜 집안의 영향이 없었겠소. 마르크스 책을 봤지만 내 성향은 운동조직과 맞지 않았소. 유물론·변증법·잉여론 같은 것도 마음에 안 들었어요."

    ―6년 반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난 뒤로는 생명사상을 들고 나왔지요? 운동권 진영에 '김지하가 변했다'며 당혹감과 충격을 줬지요?

    "감옥 안에서 '동경대전'을 읽고 동양 정신의 세계로 들어갔지요. 생명과 환경, 농업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사실은 그 이전부터 내 안에서 싹트고 있었던 것들이지요."

    ―자신이 살아온 삶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만날 얻어터지기만 하고 빛을 못 보고 살았지요."

    ―'김지하'라는 이름을 얻었고, 서로 모셔가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중요한 거요? 그게 좋은 거요? 그걸 바라고 살아온 사람 같소? 잘 살아온 것도 아니지만 잘못 살아왔다고 얘기하고 싶지 않지만…."

    ―돌아보면 어떤 점이 가장 아쉬움으로 남습니까?

    "많지요. 중요한 것은 내가 못났다는 겁니다. 나는 씩씩한 사람이 못 돼. 원래 겁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오. 감옥을 예감하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결심해야 돼. 적당히 결심하지 못해. 집사람은 이를 잘 알지. 그래서 고통 받았지. 집사람한테 늘 미안해. 워낙 고생을 많이 했어."

    ―그런 기회는 없겠지만, 가정해서 또 한 번 삶이 주어지면 이렇게 살 겁니까?

    "남들에게는 어떻게 비쳤을지 모르나 내가 찾으려는 것은 아름다움이었지. 나는 어둠 속의 '흰 그늘'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늘에서 기적 같은 흰빛, 그런 아름다움을… 내가 살아온 삶을 똑같이 살고 싶지는 않은데 그런 원리를 찾아가겠다는 바람은 변함없소."

    이제 그는 걸음걸이가 불편한 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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