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인터스텔라] "대학은 중퇴, 문화부장관은 거절" 송승환의 '동시다발' 역전 인생

입력 2018.03.03 06:00 | 수정 2018.06.14 20:24

“6살 때 아역 데뷔, 소년 가장으로 망해도 돈 벌 궁리"
“인생 키워드가 멀티와 융합… 낚싯대 여러 개 드리우고 살았다"
“문화부장관 거절한 건 잘 한 일, 평창에서 내 몫의 나라 사랑”

2018 평창동계올릭픽 개·폐막식 총감독 송승환. 축제가 끝난 지금도 “오늘은 지뢰가 안터지나?” 깜짝깜짝 놀란다는 그는, 당장은 따뜻한 나라에서 일광욕 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사진=고운호 기자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지면 추위가 살아 움직인다.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17일 동안 평창의 추위는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존재였다. 45일간, 새벽까지 이어지는 리허설을 매일 반복했던 공연팀에게도 추위의 아귀힘은 강했다. 타는 듯한 냉기가 얼굴과 등골을 헤집고 지나갔다. 날씨가 가장 무서웠고, 또한 날씨가 가장 고마웠다,고 평창동계올림픽 개·폐막식 총감독 송승환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평창에 있던 45일간 날씨가 딱 두 번 좋았는데, 그게 개막식과 폐막식이었어요." 몇몇 잡음에도 불구하고 평창동계올림픽은 우리에게 ‘경쟁의 품격' 그리고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선물처럼 안겼다. “기술적인 역량과 유연한 문화적 힘을 펼쳐냈다(월스트리트 저널)” “수천 개의 드론이 오륜기로 변해 전 세계의 시청자를 놀라게 했다(시사주간지 타임) “생동감 있고 화려한 불과 얼음의 개막식이었다(로이터 통신).

3초 단위로 콘티를 짜고, TV중계 컷 하나 하나를 모두 계산한 총감독 송승환이 그 무대 뒤에 있었다. 송승환은 1965년에 아역 성우로 방송에 데뷔했다. 1968년에 연극 ‘학마을 사람들'로 아역 최초로 동아연극상 특별상을 받았다. ‘아씨' ‘여로' 등 텔레비전과 연극 무대를 오가며 열연했고, 20대엔 최고 인기 쇼프로그램이었던 ‘젊음의 행진' MC를 맡았던 청춘스타였다. 비음이 섞인 채로 낭랑한 목소리, 사려 깊고 명랑한 진행 솜씨로 MBC 라디오 간판 프로인 ‘양희은 송승환의 여성 시대' DJ로도 오래 활약했다.

나이 마흔에 사물놀이의 흥이 넘치는 아크로바틱 서커스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한국적인 흥을 세계 언어로 풀어낸 비언어극 ‘난타'는 1997년 호암아트홀에서 오픈한 뒤 전 세계 57개국 310개 도시를 돌며, 지금까지 갈채를 받고 있다. 그 세월이 무려 20년이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폐막식은 한국 최초의 글로벌 퍼포먼스를 만들었던 송승환의 ‘동시다발' 인생 노하우가 빼곡히 녹아든 또 한 편의 역작이 되었다.

폐막식이 끝난 다음 날 평창에서 송승환을 만났다. 영하 20도로 살갗을 조여왔던 공기는 어느새 봄기운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흰 눈에 반사된 햇살이 창날처럼 실내에 꽂혔다.

그는 태어나서 가장 잘한 결정 세 가지를 “첫째, 대학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배우 활동을 한 것. 둘째, 세계 시장에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난타'를 만든 것. 셋째, MB 정부 때 문화부 장관 제안을 거절한 것.”이라고 했다. “문화부장관으로 정치권에 발 들여놓았으면 재미없는 인생을 살았을 것"이라며, 젊은이들에게는 “다른 문화권에 몸을 던져 3년 이상 살아보면, 자기만의 샛길이 보일 것"이라고 조언했다.

소년 가장으로 보낸 어린 시절 ‘헝그리정신'이 역설적으로 슬럼프 없는 인생을 만들었다. 늘 망해도 돈 벌 궁리는 했다는 송승환./사진=고운호 기자
여러 번 얼었다 녹은 땅처럼 그의 코밑은 붉게 헐어 있었다.

-기분이 어떤가요?

“멍하고 송구하고 그렇습니다. (미소지으며)이렇게 칭찬받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잘해야 본전이고 욕만 안 먹으면 된다고, 제가 스태프들에게도 단단히 일렀어요. “우리 욕먹어도 기죽지 말자, 최선을 다하자!” 그렇게 미리 마인드 콘트롤을 했거든요.”

-다만 폐막식 한류 스타 캐스팅은 예상외였다는 반응도 있어요. 개인적으로 씨엘이나 엑소는 꽤 쿨한 선택이었다고 보는데 아무래도 싸이에 대한 기대가 컸던 모양입니다. 문화적 자부심이 클라이맥스에 올랐던 터라 빅샷이 터지길 바랐던 거죠.

“스타 캐스팅이 어려운 건 호불호가 다 달라서예요. 이 사람 나오면, 저 사람 얘기해요(웃음). 어쩔 수 없죠. 싸이와 BTS까지 함께 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다들 스케줄 상 애초부터 참여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싸이는 ‘강남스타일'을 개막식 때 쓰도록 EDM으로 편곡해 줬고, BTS도 마지막 곡으로 쓰도록 ‘DNA’를 편곡해줬어요. 특별히 싸이는 ‘강남스타일'을 의미가 큰 무대에서 부르는 걸 조금 부담스러워했어요. 2014년 아시안게임 때 한류 스타가 총출동했는데 그때 반응이 좋지 않아 트라우마가 된 모양이에요.”

-‘찔레꽃'으로 유명한 소리꾼 장사익과 초등학생들이 애국가를 함께 부를 땐 울컥하더군요.

“처음부터 장사익 선생을 생각했어요. 아이와 할아버지가 함께 부르는 그림이면 좋겠다고. 강원도 아이들이 함께 해줘서 더 좋았지요.”

1218개의 드론이 평창의 하늘에 오륜기를 수놓는 풍경을 만들었다. 디지털 강국으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난 장관.
숨죽이며 시작했던 개막식이 ‘와우!'하고 터지는 감탄사의 폭죽으로 풍요했다면, ‘안녕'을 고하는 폐막식은 ‘아...’하고 휘몰아치는 말줄임표의 감동으로 충만했다. 인면조의 신화적 날갯짓, 벽화 속에서 막 튀어나온 고구려 여인들의 군무, 도깨비처럼 활공했던 저스트절크의 어반댄스는 폐막식에 이르러 장사익이 부르는 애국가 한 소절, 거북이와 민들레 홀씨의 아름다운 상여 행렬, 메탈릭한 국악과 스웨그 넘치는 현대적인 판소리로 융합의 절정을 이뤘다.

개막식에 오륜기를 선보였던 드론은 폐막식에 수호랑으로 비행했다. 전통과 현대가 거침없이 부딪히며 뿜어내는 역동적인 에너지가 오대양 육대주로 퍼져나갔다. ‘한국적인 것이 진정 세계적인 것’이라는 명제가 완성되는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은 한국인이 누가 있을까.

-전 세계가 지켜보는 생방송이라 매 순간 노심초사했을 테지만, 가장 마음을 졸였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고비마다 힘들었어요. 하루에도 지뢰가 몇 개씩 터졌어요. 가장 애를 태운 건 날씨였어요. 폐회식 이틀 전엔 강풍이 일었고 하루 전엔 안개가 자욱했어요. 카메라로 잡아도 얼굴이 안 보일 정도여서 리허설을 아예 못했어요. 그런데 당일 거짓말처럼 해가 나고 바람마저 잠잠했어요. 제가 45일간 평창에 있었는데 딱 이틀 날씨가 좋았어요. 개막식하고 폐막식 날.”

-신기하군요!

“하늘이 대한민국을 도왔던 거죠.”

-다시 한번 기분이 어떠세요?

“안도감이 커요. 주위에서 ‘대한민국 사람인 걸 자랑스럽게 만들어줘서 고맙다' 말해주시면 송구해요. 제 머리에는 안전에 대한 걱정과 스태프들에 대한 미안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어린아이부터 나이 드신 분까지 3천 명의 출연자와 1천 명의 스태프들이 새벽까지 추위에 몸을 떨며 리허설을 했는데, 사고 없이 잘 끝났어요. 그걸로 참 다행이에요.”

폐막식에 선보인 현대무용 ‘새로운 시간의 축'의 한 장면. 이번 올림픽 개폐막식에서는 미디어아트의 황홀경이 곳곳에서 연출됐다.
-아역 탤런트에서 시작해, 연극, 영화, 드라마, 쇼프로그램 MC, 매니지먼트, 세계적인 ‘난타' 공연 제작까지 다양한 영역을 두루 거친 게 많은 도움이 됐습니까?

“그럼요. 어려서부터 방송한 게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카메라 워킹 연구하고 장면과 장면을 연결하는 일로 단련되다보니…”

-전무후무한 ‘종합 예술인’이 아닌가 싶은데요.

“그런가요(웃음)? 제가 ‘젊음의 행진' MC를 보면서 동시에 피터 셰퍼의 연극 ‘에쿠우스'에서 앨런 역을 했어요. 둘 다 놓치기 싫었어요. 대중적인 감각을 익히는 것도, 연극이 지닌 해석의 힘을 배우는 것도요. 자장면도 짬뽕도 물냉면도 비빔냉면도 다 먹고 싶어 하는 스타일이에요(웃음)”

-자의든 타의든 보통 자장면이나 짬뽕을 선택하게 되는데, 점점 더 융합하고 확장했다는 게 놀라워요. 비판하는 사람은 없었나요?

“어릴 땐 연극을 하다 TV로 가면 돈에 미쳐서 그런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저도 순수하게 연극만 해야 하나, 고민도 했죠. 그러다 결정을 내렸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자고.”

-유연하시군요.

“유연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이렇게 못했어요(웃음). 올림픽 행사도 이왕 하려면 재밌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만들자, 그것만 근본으로 두고 모든 걸 열어뒀어요. 정구호나 손진책 연출이 했으면 또 그분들 색깔대로 잘 나왔을 거예요(웃음).”

-공연을 보는 타깃은 어떻게 잡았습니까?

“올림픽이 전국체전은 아니잖아요. 경기장 안의 3만 5천 관객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이 TV쇼를 볼 수십억 이상의 시청자들을 타깃으로 잡았어요. 소수 예술가에게 평가받는 자리가 아니라 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가 즐기는 쇼라고 생각했어요. 지식인도 보고 무학자도 보고, 첨단 아티스트도 감동하고 시골 아줌마도 신이 나야죠.”

-국가 행사인데 정권이 바뀌는 시기에 실무를 진행해야 했던 고충도 있었겠지요?

“(웃으며)무엇보다 돈이 없었어요.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어요(베이징 올림픽의 1/10 수준인 600억이 배정된 예산이었다). 베이징도 소치도 큰 행사는 주로 인력이 대거 투입되는 매스게임 형식인데, 사람을 쓸려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가요. 숙박, 체류, 운송 등등. 우리가 런던, 소치, 베이징 올림픽의 ‘규모’를 흉내 냈다면 망했을 거예요(웃음). 오각형 원형 야외무대에 적은 인원을 세우는 대신 그 공백을 미디어아트로 활용해 채우자고 했던 게 신의 한 수였어요.”

-영화의 CG처럼 세트와 물량의 한계를 극복할 뿐 아니라 증강 현실 체험, 카오스와 매트릭스의 미술적인 쾌감도 배가시킨 미디어아트가 큰 몫을 했습니다.

“미디어아트는 소치올림픽 때부터 써왔는데, 이번에 극대화됐어요. 영상은 큰 공연에 이점이 많아요. 첫째, 방송 카메라가 위에서 찍으면 바닥이 공연의 배경이 되기 때문에 영상을 쏘는 게 대단히 효과적이에요. 둘째, 올림픽 공연은 일종의 비언어극이기 때문에 스토리 전달이 힘든데, 공연과 공연 사이에 VCR 영상으로 메시지를 전하면서 드라마를 끌고 갈 수가 있어요. 셋째, 악천후 등의 비상사태를 가정하면 공연은 힘들어도 영상은 쓸 수가 있어요.”

“꿈? 없어요. 저는 너무 많은 복을 받고 살았어요.” 여전히 소년같은 62살의 송승환./사진=고운호 기자
-어찌 보면 송승환의 인생 스타일이 멀티와 융합인 셈인데, 그렇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저는 인생 내내 낚싯대를 여러 개 드리우고 살았어요. 어린 시절에 소년 가장이었기 때문에 늘 망해도 돈 벌 궁리를 했죠. 영화 섭외 안 들어오면 드라마 하고, 드라마도 없으면 MC라도 해야 했어요. 생존 방법이 늘 여러 장르에 몸을 걸치고 있는 거였죠. 그런데 가장 중요한 건 그게 재미있었다는 거예요(웃음).”

-1985년 한창 잘 나가던 청춘스타 시절에 갑자기 뉴욕으로 잠적한 이유는 뭔가요?

“제가 84년에 처음으로 해외를 가봤습니다. KBS 최초 해외 촬영드라마 ‘불타는 바다' 촬영으로 저와 김영철, 이경진 씨가 함께 바레인, 싱가포르 등으로 떠났죠. 저는 거기서 또 파리로 이동해서 원미경 씨와 이두용 감독의 ‘낮과 밤' 영화를 촬영했어요. 잘나가던 시절이었으니까요(웃음). 스위스, 오스트리아까지 돌고 혼자 뉴욕에 갔어요. 연극 하던 사람이 뉴욕에 가서 브로드웨이를 보고 문화 충격을 받은 거죠. 거기서 살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서울에 와서 뉴욕 갈 궁리를 하고 있던 차에 또 아버지 사업이 망했어요. 쫄딱 망했죠.”

-20대 후반이었죠?

“그렇습니다. CF로 드라마로 그때까지 번 돈이 다 거덜이 났어요. 20대 후반에 알거지가 되고 나니 허무하기도 하고, 딱 일하기가 싫어지더라고요. 그때 다시 뉴욕 발동이 걸렸어요, 85년에 부모님 빚 다 정리하고 떠났어요. 드라마 영화 섭외 다 거절하고서. 어린 나이였지만 이 나이에 돈 모으는 것보다 새로운 곳에서 많이 느끼는 게 재산이다 싶었어요.”

스물 여섯에 여배우 강문영과 함께 출연했던 영화 ‘스물 하나의 비망록(1983년)'. 인터넷 상에서 ‘송승환의 리즈시절'로 한동안 회자됐다
-그렇게 간 뉴욕에서 왜 좌판 깔고 시계 장사를 했지요?

“하하하하. 돈이 없었어요. 집안이 거지꼴이 돼서 맨몸으로 갔으니 시계라도 팔아서 생활을 해야지요.”

-학교는요?

“학교는 안 갔어요.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에서 청강만 하고, 그냥 뉴욕 생활을 즐겼어요. 유명 대학 졸업장이 저한테 무슨 큰 의미가 있겠어요?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여로'라는 드라마에 출연했던 터라, 대학은 외대 아랍어과를 갔어요. 거기도 중간에 그만뒀어요. 나중에 외대에서 명예 졸업장 주신다고 해서 감사히 받았어요. 개인적으로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졸업 가운에 학사모 쓴 사진을 보더니 펑펑 우시더라고요. ‘잘했다, 잘했다!’ 하시면서. 부모님한테는 그동안 한이 되셨던가 봐요. ”

-한국은 아직 학력 중심 사회인데, 그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웠던 건가요?

“무엇이든 제 판단 기준은 딱 하나예요. 그 일이 최선을 다할 만큼 재미있느냐. 오디션 볼 때 학력증명서 떼가는 거 아니잖아요(웃음).”

-작품 목록을 보면 ‘얄개전’, ‘아씨’, ‘여로’부터, 김수현 작가의 ‘목욕탕집 남자들’ ‘무자식 상팔자' 인정옥 작가의 ‘아일랜드’ 등 다양합니다. 연극은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두 번 했더군요. 개인적으로는 다이얼로그가 좋은 배우로 느끼고 있습니다. 작품을 고르는 특별한 기준이 있었습니까?

“작품 고르는 기준은 두 가지예요. 하나는 그 역할이 하고 싶을 때, 또 하나는 돈이 필요할 때죠.”

-가장 절실한 연기는 돈 필요할 때 나온다고 윤여정 씨도 그러더군요(웃음).

“그럼요. 얼마 전 한 신인 작가가 예술적 영감을 받을 기대로 유명 작가들 모임에 갔더니, 다들 부동산과 주식 얘기만 해서 놀랐다더군요. 버나드 쇼가 그랬어요. 은행가들은 모이면 예술 얘기하고 예술가들은 모이면 돈 얘기한다고. 예술가들에게 가난은 뼈가 저려요. 어느 화랑에서 돈을 잘 주는지, 이번 달 방세는 냈는지…”

-‘난타' 성공으로 돈 걱정에서는 벗어났지요?

“‘난타'가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진 않았지만 하고 싶지 않은 드라마를 거절할 수는 있게 됐습니다. 거절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에요. 안정적 프로덕션으로 매달 월급을 받아요. 신기한 게 ‘난타'가 20년 됐는데 여전히 관객이 들어요. 명동, 제주도, 방콕에 전용 극장이 있는데 70~80%는 객석이 차거든요.”

-‘난타'는 국경을 초월해서 지속가능성이 높은 작품이에요. 브로드웨이에 진출하고 뉴욕타임스에서 호평도 받았을 때 뭉클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사물놀이 리듬을 요리와 비벼 이토록 흥 넘치는 아크로바틱 서커스를 만들 생각을 했나요?

“젊은 시절에 3년 6개월간 뉴욕의 브로드웨이에 있었잖아요. 한 달 정도 있으면 몰랐을 텐데 3년 6개월을 있었더니 보였어요. 굉장히 수준 높은 작품도 있지만, 좀 후진 작품들도 행세를 하더라고요. 박지성 선수도 공감할 거예요. ‘외국 나가서 뛰어보니 정말 잘뛰는 선수도 있지만, 좀 못하는 놈도 연봉을 꽤 받네.’ 글로벌한 곳에서 상황을 입체적으로 경험하니 겁이 좀 없어졌달까요. 내가 최고는 못 돼도 열심히 만들면 아주 못하는 놈들보다는 잘하겠다(웃음).

공연 환경도 한몫했어요. 한국 관객만 대상으로 해서는 수익 보장이 안 됐어요. 잘 만들어서 뉴욕 파리에서도 올려야 하는데 그 답을 비언어극에서 찾았죠. 한국 사물놀이 장단을 활용했는데, 미국에서는 또 공연 제목이 ‘Cookin’이예요(웃음). 지금처럼 많은 아티스트들이 참여해서 아이디어를 보태 완성해 나갔어요.”


2003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난타'. 미국 제목은 ‘Cookin’.
-스케일과 디테일 중 어느 것에 더 집중하나요?

“처음에 큰 구성, 스토리는 제가 짜요. 이번에 평창 올림픽에서도 다섯 아이의 모험이라는 스토리를 고집했어요. 갖은 반대로 다섯 아이가 여러 번 실종됐다가도 결국 다시 돌아왔죠(웃음). 디테일은 개별 아티스트에게 다 맡겨요. 최종적인 디테일은 또 제가 결정하죠. 방송 중계에서 어떤 앵글을 잡을지, 이 장면에 조명이 2~3초가 좋을지 3~5초가 좋을지…방송 중계는 또 제가 자신 있으니까.”

-좋은 리더인가요?

“참견을 잘 안 하는 리더에요(웃음). 컨셉과 스케일에 동의하면 끝까지 믿고 맡겨요. 평창올림픽 행사도 총감독은 저지만, 저 혼자 한 게 아니에요. 수많은 크리에이터들의 아이디어를 저는 순서만 배치했을 뿐이에요. 작곡가, 안무가, 의상, 미디어아트 등 여러분들이 정말 열심히 해주셨어요. 그 덕에 제가 이렇게 단독 인터뷰도 하는 거죠.

그런데 또 너무 열심히들 하니 충돌도 있었어요. 장르별로 제 각자 돋보이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어요. 그 충돌을 또 제가 정리하고 해결해 나간 거죠. 개막식 연출가 양정웅과 폐막식 연출가 장유정이 중간 역할을 기가 막히게 잘했어요. 양정웅은 웃으면서 폭발 직전의 아티스트들을 달래고, 장유정은 눈과 바람과 안개에 빼앗겨 살인적으로 줄어든 폐막식 리허설 시간을(불과 3일) 악바리 정신으로 밀어붙였어요.”

-올림픽 공연 같은 큰 국제 행사를 만드는 리더에게 필수적인 능력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호흡이 잘 맞는 스태프를 꾸려야 하죠. 2년 6개월을 함께 준비하고 실행하면서 갈등이 없을 수가 없어요. 놀라운 건 올림픽이라는 세 글자가 갖는 힘이에요. 난파 직전에도 ‘그래도 올림픽인데… 평생 한 번 하는 건데…’ 이런 마음이 서로를 일으켰어요.”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저는 인생이 동시다발이었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수업 시간에 대본을 외웠고, 분장실에서 시험공부를 했죠. 테크팀, 퍼포머, 중계팀을 한 번에 지휘하는 힘은 노력해서 된 게 아니에요(웃음). 어려서부터 항상 머릿속에 서너 개 프로젝트가 멀티 하게 굴러갔어요.”

-많은 분이 개막식의 인면조와 드론 쇼를 얘기하는데 저는 폐막식에서 LDP 현대 무용단원들과 미디어아트가 협연한 ‘새로운 시간의 축'과 ‘기억의 여정'이 좋더군요.

“목진요 미디어 아티스트의 매핑이 정말 좋았어요. ‘기억의 여정'은 올림픽에서 다치고 죽은 사람들을 위한 묵념 같은 공연인데, 거북이와 민들레 홀씨가 참 잘 어울렸습니다. 양방언 감독이 음악을 만들어서 완성도가 높아졌죠. 전 복잡한 동선으로 가지 말고 상여 행렬처럼 해봐라, 한마디만 했어요(웃음).”

-성화대까지 쌓아 올린 30개의 굴렁쇠 오마주도 인상 깊었습니다. 88올림픽 지휘하신 이어령 전 장관이나, 베이징 올림픽 행사 총감독인 장이머우 감독 등이 워낙 거물이라 부담을 느꼈을 법도 한데요.

“부담이 왜 없었겠어요. 이어령 선생은 제일 먼저 찾아뵈었어요. 밥 먹으면서 조언을 많이 해주셨어요. 당시엔 정권의 지휘하에 일사불란하게 치른 점도 있고 전통을 부각하는 게 비교를 당하지 않는 최선의 전략이었어요. 지금은 다르죠. 우리는 대중문화와 순수문화 모든 면에서 국제 경쟁력이 있으니 충분히 융합 공연을 기획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인생의 역작은 못 남겼어요. 지금이 끝이라고는 생각안해요. 노역의 세계가 남아있으니까(웃음). 어느 날 감독이 저한테 맞는 노인 배역을 주면, 또 그걸 잘 해보고 싶어요.” /사진=고운호 기자
-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쇼나 공연이 있습니까?

“많죠. 머릿속에 늘 그리고 있어요. 그런데 100여 명의 직원을 책임지는 주식회사를 운영하다 보니(PMC프로덕션), 항상 수익을 생각해요(웃음).”

-배우로서 아쉬운 점은 없습니까?

“TV 드라마는 잊히잖아요. 제가 활동하던 80년대는 호스티스 물이나 액션물 영화가 대부분이었어요. 전 오히려 TV문학관에 출연하는 걸 좋아했어요. 연극 ‘에쿠우스'는 두 번 했어요. 20대에는 소년 알런을 했고, 50대에는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를 했죠. 박찬욱 감독의 데뷔작인 ‘달은 해가 꾸는 꿈'에도 출연했고요(웃음). 결국, 인생의 역작은 못 남겼어요. 지금이 끝이라고는 생각안해요. 노역의 세계가 남아있으니까(웃음). 어느 날 감독이 저한테 맞는 노인 배역을 주면, 또 그걸 잘 해보고 싶어요.”

-좋아하는 예술가는 누군가요?

“어릴 때는 제임스 딘과 마론 브란도에게 반했어요. ‘에덴의 동쪽'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만든 엘리아 카잔 감독도 좋아했죠. 음악은 사춘기 때 들었던 송창식, 양희은이 여전히 좋아요.”

-슬럼프는 없었나요?

“거의 없었어요. 배우에서 제작자로, 매니지먼트와 음반 제작자로 계속 몸을 바꿨으니까. 배우 섭외가 안 들어올 때 강수지 씨의 ‘보랏빛 향기' 음반을 제작했어요. 베이시스트였던 윤상이 처음으로 작곡한 곡이죠. 그것도 가요톱텐이나 쇼 특급 MC를 해서 시장을 읽은 덕이 커요.”

-모든 게 아름답게 끝난 이 시점에서 편안하게 던지는 질문인데, 송승환이 평창동계올림픽 개·폐막식 총감독에 뽑힌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빙그레 웃으며)글쎄요. 처음엔 공모를 했잖아요. 저더러도 공모에 참여하라는 제안이 왔는데, 전 안 했어요. 공연계 대선배들과 경쟁 PT를 해야 하는 상황이 제 정서로는 내키지 않았고, 올림픽은 우리 기획인데 심사위원들이 외국인들이라는 것도 못마땅했죠. 그런데 공모에서 마땅한 사람을 못 찾은 모양이에요. 선정위원회에서 결국 저한테 다시 의뢰를 해왔어요. 저는 몇 년 전 장진, 임권택 감독이 인천아시안게임 연출하면서 고생한 걸 다 알아요. 칭찬보다는 욕 들을 확률이 높은 자리라 고민하다 결정했어요. ‘시켜줄 때 하자'(웃음).”

-평창 공연의 대대적인 성공 이후로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달라질 건 거의 없어요. 다시 배우로 돌아가 연기하고 공연을 만들겠죠. 저는 여섯 살 때부터 아역 배우를 해서 사진 찍고 사인하는 게 일상이에요(웃음). 지금 당장은 올림픽 공연 만든 총감독이라고 ‘와~!’하지만, 지나면 또 잊히겠지요(웃음).”

-인생에서 가장 잘 한 것 세 가지만 말씀해주시죠.

“첫째, 대학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배우 활동을 한 것. 둘째, 세계 시장에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난타'를 만든 것. 셋째, MB 정부 때 문화부 장관 제안을 거절한 것.”

평창의 메인스타디움을 향해 손을 흐드는 송승환. /사진=고운호 기자
-문화부장관 자리는 왜 거절했나요?

“정치계와 인연이 닿는 걸 경계했어요. 지금도 정치엔 관심이 없습니다. 만약 제가 어느 한쪽에 깊숙이 발을 담그고 있었다면, 정권이 바뀌는 이 혼란 속에 평창 행사를 제대로 이끌어갈 수 없었겠지요(웃음).”

-인생이 참으로 명료하군요.

“재미를 추구하며 살았어요. 장관이 뭐가 재밌겠어요. 올림픽 개폐막 공연 맡아서 잘하는 게, 제 몫의 나라 사랑이에요. 국가 행사도 그렇지만, ‘난타' 해외 공연을 본 교포들이 제 손 잡고 “한국인의 자부심을 느끼게 해줘서 고맙다” 그러면, 저는 제 몫을 하고 사는가 보다 하는 거죠.”

-꿈이 있습니까?

“없어요. 저는 복을 넘치게 받았어요. 벅찬 감정을 느낄 기회가 남보다 많았어요. 개막식 끝나고는 울었어요. 너무 고생한 스태프 생각이 나서… 그 추운 밤을 꼴딱꼴딱 새 가며, 그 희생을 제가 다 아는데(울먹이며), 그게 희열로 오니까 주체를 못 했어요. 저는 그런 기회를 남보다 누렸으니 지금처럼 할 일 하며 살면 돼요. 앞으로 성공하든 못하든. 비난도 받고 칭찬도 받고 하면서요.”

기념사진을 찍고 싶어 주변에서 서성이던 남녀노소 인파를 그는 너그럽게 맞아주었다. “멋진 공연을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시민들은 실로 행복한 얼굴로 돌아갔다. 눈도 바람도 안개도, 밤하늘을 수놓았던 드론과 불꽃, 응원의 함성도 사라진 채 평창은 이제 조용히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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