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의 麗水漫漫] AI는 '멍때리지' 않는다!

조선일보
  •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나름 화가
    입력 2018.02.28 03:13

    자유로운 생각의 흐름이 인간 창조성의 본질
    현재 '의식혁명'도 '산업혁명' 개념으론 설명 못 해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나름 화가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나름 화가

    화실에 앉아 있다. 그냥 자꾸 바다만 본다. 큰아들이 한 달 정도 내 여수 화실에서 지내다 갔다. 있는 내내 '효과음향'을 넣는 아르바이트를 밤새도록 했다. 그래도 눈앞에 바로 바다가 보이는 아빠 화실에서 일하니 너무 좋다고 했다. 아들이 몇 주일 있다 가니 참 많이 허전하다. 서울 올라가면 바로 볼 수 있는 아들이다. 그런데도 거 참 가슴이 푹 꺼지듯 쓸쓸하다.

    그때, 할머니도 그렇게 쓸쓸해하셨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이면 강원도 철원 변두리에 있는 할머니 댁에 가곤 했다. 서울서 내려오는 손자들을 위해 할머니는 방학 내내 그 귀한 고깃국을 끓여주셨다. 우리가 떠나는 날이면 시외버스가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섭섭해하셨다. 우리가 떠나면 바로 읍내 장터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사서 끌고 가셨다.

    인근 군부대에서 '짬밥'을 얻어와 일 년 동안 그 강아지를 정성스럽게 키우셨다. 그렇게 손자들이 내려올 때마다 할머니네 강아지는 바뀌고 또 바뀌었다. 참으로 궁핍하던 시절 이야기다. 우리가 떠난 뒤, 할머니는 우리가 지내던 방은 한동안 들여다보지 않는다고 하셨다.

    아, '내 친구 귀현이'가 키우던 강아지 '콩이'는 어찌 되었는지 갑자기 궁금하다. (물론 그 쥐똥만 한 '콩이'는 순전히 반려견이다.) 귀현이는 뒤늦게 캠핑장을 하면서 '인생의 직업'이라고 즐거워하다가 간암이 발견되어 느닷없이 세상을 떠났다. 얼마 전 이야기다. 내가 쓴 모든 책에 빠짐없이 등장하던 친구다. '내 친구 귀현이'가 내 모난 성격을 중간에서 다 걸러주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가 떠난 후, 형편없는 내 인간관계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다.

    원래 여수에 함께 내려오기로 했었다. 작은 배를 사서 귀현이는 선장을 하고, 나는 '어부 김정운'이라는 회사를 차리기로 했다. 내가 사방에 돌아다니면서 광고를 하고, 부지런한 귀현이는 잡고기를 직접 잡거나 새벽 어시장에서 싱싱한 고기를 사서 지인들에게 부쳐주는 생선 택배 사업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제 나만 혼자 여수에 내려와 있다. 배도 있고, 수시로 나가 고기도 잡는다. 택배로 보낼 만큼 많이 잡는 날도 있다. 그런데 '내 친구 귀현이'는 없다. 다 있는데, 귀현이만 없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그렸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그렸다!’/그림=김정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지금 내가 뭐 하나 싶어 고개를 세게 흔든다. 다시 바닷가 내 화실이다. 불과 몇 분 멍하고 있는 동안, 내 생각은 아들과 할머니, 그리고 '내 친구 귀현이'를 오갔다. 며칠 전과 수십 년 전, 그리고 1~2년 전의 시간대를 가로질렀다. 화실 책상에 있던 아들 컴퓨터, 할머니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그 '불쌍한 강아지', 그리고 귀현이와 계획했던 회사 '어부 김정운' 등이 사진처럼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이처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순간을 날아다니는 생각을 '비자발적 기억(involuntary memory)'이라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왜 그토록 중요하게 언급되는지 몰랐다. 마들렌을 홍차에 적셔 먹는 그 이야기를 누군가 언급하면 '참 허세 부린다'고 생각했다. 꾹 참고 그 소설을 읽으려 했다가 집어던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의 소설은 인간 창조성의 본질을 정확하게 집어낸 것이었다.

    인간은 도대체 언제부터 '창조적(creative)'이 되었을까? 단어 사용의 역사적 빈도수를 보여주는 '구글 엔그램 뷰어(Google Ngram Viewer)'에서 '창조성(creativity)'을 검색했다. 놀랍게도 '창조성'은 1920년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단어다. 이건 너무나 중요한 포인트다! '창조성'이란 단어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1900년대 전후로 인류 정신사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시작되던 바로 그 시기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심리를 '무의식'으로 풀어내기 시작하던 바로 그 지점이다. 프로이트는 당시에 유행하던 최면요법 대신 '자유연상(freie Assoziation)'을 무의식에 접근하는 통로로 사용했다. 1923년 '자아와 이드(Das Ich und Es)'라는 책에서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을 옆의 그림처럼 묘사했다. (프로이트는 단순한 흑백의 선으로 그렸다. 색은 내가 해석해서 칠했다.)

    프로이트보다 조금 앞서 미국의 윌리엄 제임스(W James)는 '심리학 원리(Principles of Psychology)'라는 책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란 개념을 사용했다. 문학에서는 프루스트를 비롯해,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등이 유사한 방식의 인간 의식 작동구조를 응용해 소설을 썼다.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날아다니는 생각', 그리고 그 생각의 고리를 의식할 수 있는 '자기성찰(Introspektion)'에 인간 창조성의 본질이 있다.

    독일서 태어난 내 큰아들은 독일 여행을 다녀온 후, 알고 보니 독일의 섬유 유연제가 '엄마 냄새'였다고 했다. 미국서 공부한 어떤 교수는 미국식 대형 매장에 가면 유학 시절 생각이 자동적으로 떠오른다고 했다. 바닥 청소용품 때문이었다. 내겐 유학 가면서 처음 탔던 루프트한자 승무원의 향수 냄새가 '독일'이다. 이런 생각의 연결 고리는 '멍 때릴 때' 생긴다. 인공지능(AI)은 이런 거 절대 못 한다.

    하나 더. 언젠가부터 한국 사람들은 '창조'란 단어를 언급하지 않는다. 이전 정권에서 '창조'를 참으로 희한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창조경제'를 한다면서 '말 타는 처녀'나 후원했다. 몹시 창피했다. 사람들은 이제 죄다 '창조' 대신 '4차 산업혁명'이란 단어를 쓴다. 젠장, 오늘날의 이 엄청난 '의식혁명'을 어찌 '산업혁명(産業革命)'이란 낡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4차 산업혁명' 또한 순 '개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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