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에 '희망' 심은 그들… 누가 몽상가라 했나

입력 2018.02.27 03:03

[평창, 뜨거웠던 17일]

- 이용 썰매 대표팀 총감독
썰매 트랙 하나 없던 한국에서 아스팔트 달리며 메달 꿈 일궈

- 백지선 남자 아이스하키 감독
3~4부 리그 전전하던 한국팀을 세계 톱 디비전으로 끌어올려

눈앞에 아직 발자국 없는 불모지가 있다. 용기를 내 발걸음을 뗀다. 꿈을 좇는 이들을 우리는 '개척자'라고 부른다. 17일의 짧은 동계올림픽 축제는 막을 내렸지만 희망의 여운이 남았다. 평창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선사한 개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 썰매는 금 1개(남자 스켈레톤), 은 1개(남자 봅슬레이 4인승)의 기적 같은 성과를 냈다. 그 뒤엔 이용(40) 봅슬레이·스켈레톤 대표팀 총감독이 있었다. 메달을 손에 쥔 선수들은 하나같이 이 감독의 목에 다시 메달을 걸어줬다. 그의 노고(勞苦)를 아는 선수들은 평소에도 이 감독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다.

학창 시절 씨름·레슬링 선수였던 이 감독은 1995년 우연히 루지 종목에 입문했다. 한국에선 썰매 종목 자체가 생소했던 때다. 1998 나가노올림픽 32위, 2010 밴쿠버올림픽 36위에 그쳤지만 그는 한 우물을 팠다. 2011년 봅슬레이·스켈레톤 대표팀 감독을 맡으면서 지도자로 역량을 발휘했다. 국내에 썰매 트랙 하나 없던 당시 이 감독은 선수들과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바퀴 달린 썰매를 밀며 구슬땀을 흘렸다. 그렇게 수년 만에 한국 썰매는 세계 정상급으로 발돋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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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켈레톤 금메달리스트 윤성빈(왼쪽 사진 속 오른쪽)이 17일 평창올림픽플라자에서 자기 금메달을 이용(왼쪽 작은 사진) 총감독에게 걸어주는 ‘깜짝 이벤트’를 열었다. 이 감독은 예상하지 못했던 제자의 이벤트에 얼굴을 감싸고 눈물을 흘렸다. 한국 남자 아이스하키 백지선(오른쪽 사진) 감독이 20일 열린 8강 플레이오프에서 핀란드에 2대5로 패한 후, 선수들을 향해 손뼉을 치며 눈물을 쏟았다. 세계적인 강호를 상대로 투지 넘치는 경기를 펼친 대표팀 선수들에게 보내는 격려였다. /올댓스포츠·오종찬 기자

백지선(51) 감독은 '긍정 리더십'으로 남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을 바꿔 놓았다. 수년 전만 해도 한국 아이스하키는 세계선수권 3~4부 리그를 전전했다. 올림픽 무대는 말 그대로 꿈이었다. 하지만 2014년 7월 백 감독이 부임하면서 전혀 다른 팀이 됐다. 그는 항상 "올림픽 꿈을 잊지 말자. 한국이 자랑스러워하는 팀이 되자"고 선수들에게 주문했다. 못한다고 질책하기보단 '잘했다. 우리는 이길 수 있다'고 끊임없이 독려했다. 지옥 같은 훈련을 이겨낸 남자 아이스하키는 결국 지난해 세계 16강이 겨루는 톱 디비전으로 승격했다. 한국은 처음 출전한 평창에서도 세계 4위의 강팀 핀란드를 상대로 두 골을 넣는 저력을 보여줬다. AP통신은 "오랜 꿈을 현실로 이뤄낸 백 감독은 한국 아이스하키의 선구자(trailblazer)"라고 평했다.

오랜 불모지였던 한국 설상(雪上) 종목은 개척자 정신을 가진 선수들로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평창에서 한국의 역대 첫 설상 메달을 거머쥔 이상호(23·남자 스노보드 평행대회전 은)는 "후배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줘 나 스스로 자랑스럽다. '스노보드의 김연아'가 되고 싶다"고 당차게 말했다. 프리스타일 스키 모굴의 최재우(24)는 2차 결선에서 끝까지 공중회전 기술을 구사하다가 눈밭에 떨어졌다. 휴대전화까지 정지시키고 올림픽을 준비한 그는 경기 후 "인생에서 거쳐야 했을 경기를 치렀을 뿐"이라며 "난 아직 어리다. 베이징(2022 동계올림픽)까지 도전하겠다"고 했다. 영화 '국가대표'의 실제 주인공인 남자 스키점프 최흥철(37)과 최서우(36)·김현기(35)도 묵묵히 개척자의 길을 닦았다. 세 사람은 여섯 번째 맞은 평창올림픽에서 단체전 최하위를 기록했지만 "몸 관리를 잘해서 다음 올림픽에도 도전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각 종목에서 '1호' 타이틀을 단 선수들도 평창을 지렛대 삼아 더 큰 꿈을 꿨다. 이번 대회 15위를 기록한 '한국 최초 여자 스켈레톤 올림피언' 정소피아(25)는 "책임감과 자부심을 동시에 느낀다. 4년 뒤엔 '톱 3'에 들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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