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된 靑 국민 청원 게시판, '인민재판소' '분노의 배출창구' 부작용 속출

입력 2018.02.23 11:16 | 수정 2018.02.23 11:34

靑 ‘국민 청원’ 운영 6개월째…‘소통’·‘공론’ 긍정 기능 있지만 이면엔 부작용 속출
靑 관계자들도 난색 “분노의 배출창구, 인민재판소 우려” “답변 곤란”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모토로 만든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이 운영된 지 6개월이 지났다. 작년 8월 19일 청와대가 청원 게시판을 만든 뒤 23일 오전 현재까지 게시판에 올라온 청원 글은 12만4500건을 넘었다. 일평균 658건의 청원이 올라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국정 현안과 관련한 청원을 익명으로 올릴 수 있다. 청와대는 30일 동안 20만명 이상의 국민이 추천한 청원에 대해서는 정부 및 청와대 관계자(장관·대통령 수석 비서관·특별보좌관 등)가 답하도록 하고 있다. 청와대는 지금까지 8건의 청원에 대해 답변했다. 청소년 보호법 폐지, 낙태죄 폐지, 주취감형 폐지, 조두순 출소 반대, 권역외상센터 지원, 전안법 개정, 가상화폐 규제 반대, 정형식 판사(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항소심 판사) 특별 감사 청원 등이다. 이중 정형식 판사 관련 청원에 대해서 청와대는 “청와대가 재판에 관여하거나 판사를 징계할 권한은 없다”고 답변했었다.


청와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 첫 화면의 모습. 최다 추천 청원으로 ‘왕따 논란’에 휩싸인 평창 동계 올림픽 국가대표 김보름·박지우 선수의 자격박탈을 요구하는 청원이 올라와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해당 청원에 대해 “인민재판 우려가 나오는 것을 알고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청와대 홈페이지
23일 현재 최다 추천을 받은 청원은 평창 동계 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팀추월 종목 국가대표인 김보름·박지우 선수의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하고 빙상연맹을 처벌해달라는 내용의 청원이다. 지난 19일 게시된 이 청원 글에는 58만명이 넘는 동의가 쏟아졌다. 해당 글의 작성자는 “김보름·박지우 선수는 개인의 영달에 눈이 멀어 같은 동료인 노선영 선수를 버리고 본인들만 앞서 나갔다. 인터뷰는 더 가관이었다”며 “인성이 결여된 자들이 한 국가의 올림픽 대표 선수라는 것은 명백한 국가 망신이다. 김보름·박지우의 국가대표 자격 박탈, 국제 대회 출전 정지를 청원한다”고 했다.

이 청원은 현재 청와대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이밖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남북 단일팀 반대 서한을 보낸 자유한국당 나경원 의원의 평창 동계 올림픽 조직위원직을 박탈해 달라는 내용(추천수 36만명), 국회의원 급여를 최저시급으로 책정해달라는 내용(27만명), 미성년자 성폭행 형량을 높여달라는 내용(23만명), 일베사이트 폐쇄를 요구하는 내용(22만명), 아파트 단지내 교통사고에도 도로교통법 상 중과실을 적용해달라는 내용(21만명) 초·중·고교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21만명), 댓글 조작 의혹 관련 포털사이트 네이버 수사 요청(21만명), 경제민주화 촉구(20만명) 등이 청와대의 답변을 받을 수 있는 요건을 충족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은 취지대로 ‘소통’이란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국민들이 관심있는 이슈를 공론화한다는 의미도 있다. 미국·영국·프랑스 등에서도 이 같은 국민청원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은 미국 백악관의 청원 사이트인 ‘위 더 피플(We The People)’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그러나 무분별한 청원에 우려도 나온다. 욕설이나 비속어를 사용한 게시물이 게재되기도 하고, 국정 현안과 관계 없는 개인 민원성 글도 올라오기 때문이다. 또 동일한 사람이 같은 게시물을 여러 차례 올리거나 중복으로 추천하는 경우도 있어 논란이 된 바 있다. 현실성이 없는 제언,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는 글, 특정 개인을 겨냥한 인신공격성 글도 올라온다.

일부 청원 참여자들이 한 계정으로 중복 청원 참여를 하는 등 ‘청원 조작’ 의혹이 불거지자 최근 청와대는 일부 모바일 메신저를 통한 접속을 중단했다. 또 욕설·비속어 사용 청원, 유해 내용이 담긴 청원, 민원성 청원 등이 빗발치자 청와대는 청원 게시판 상단에 ‘국민 청원요건’이라는 경고성 문구를 게재했다. /청와대 홈페이지
이 때문에 청와대 관계자들은 골머리를 썩고 있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전날 국회 운영위원회에 나와 국민 청원 게시판에 대해 “(일부) 답변하기 부적절한 성격의 내용들이 올라온다”며 “답변하겠다고 약속한 이상 곤란한 질문이라도 원론적 답변이라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참 곤란한 것은 예를 든 것처럼 한 의원님의 문제나 국회와 관련한 것이 올라오거나 할 때 저희가 답변하기 곤란하다”며 난색을 표했다. 임 실장이 언급한 ‘한 의원님 문제’는 나경원 의원 평창 동계 올림픽 조직위원직 파면 요구 청원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고민정 청와대 부대변인과 청와대 뉴미디어비서관실 김선 행정관도 21일 ’11:50 청와대입니다’ 라이브 방송에 나와 국민 청원 게시판 관련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고 부대변인은 김보름·박지우 선수 관련 청원 문제 등에 대해 “청원 게시판이 분노의 배출창구가 되는 것이 아닌가, 인민재판소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고 했다. 고 부대변인은 “청와대가 입법기관이 아니어서 모든 것을 해결해드릴 순 없을 것”이라면서도 “소통의 창구를 열어놓는 것은 큰 의미다. 소통은 쉽지 않지만 꼭 가야할 길임은 분명하다”고 했다.

김 행정관도 “청원 게시판에 개인에 대한 지적이 나오는 것이 부작용이라는 의견을 알고 있다”면서도 “청원은 국민들의 의사 표시라서 그것이 항상 차분하게 개진되기만을 바랄 수는 없다. (김보름·박지우 선수 관련 청원이) 국민들의 분노의 표시일 수 있는데, 청와대가 받아들이고 경청하면서 사회를 바꾸어나가는 목소리로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청원 게시판을 폐쇄하거나 실명제를 도입해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무소속 이용호 의원은 22일 논평을 내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인민재판장화 되고 있고, 적절치 못한 요구와 답변으로 삼권분립을 위협하고 일부 유명인은 ‘집단 린치’를 당하고 있다”며 “부분 실명제를 도입하거나 게시판을 폐쇄해야 한다”고 했다. 이 의원은 백악관 청원 게시판은 회원 가입(실명인증) 뒤 이용할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실명인증 및 회원가입을 한 후 이용하게 하되 게시물은 익명처리하고, 청와대 답변 시 작성자 아이디 일부를 공개하는 방식이라면 무분별한 청원이나 중복추천 문제는 상당 부분 해소될 것”이라고 했다. 이 의원은 또 “(청와대가) 고공지지율만 믿고 충분한 검토 없이 내놓은 어설픈 제도가 생사람을 잡는 격으로 현 정부의 발등을 찍고 있다”고도 했다.

일부 청원 이용자들도 “중복 참여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지 않는 이상 국민청원 게시판을 폐쇄해야 한다”, “하루 혹은 일주일내 단 한 번만 청원할 수 있게 해 달라” 등의 글을 청원 게시판에 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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