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茶山의 꿈은 사라지고, 城은 불탔다

입력 2018.02.14 03:04 | 수정 2018.02.14 10:48

[111] 폐허가 된 강진 병영성과 정약용의 깨진 꿈

강진에서 생산된 고려청자, 조선 500년 내내 잊혀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도요지 찾아내 부활
선진 유럽 기술 무장한 하멜, 돌담 쌓고 광대짓 구걸 생활
정약용, '천주쟁이' 낙인… 포항 거쳐 강진 18년 유배
사돈댁 해남 尹씨 지원, 제자들과 개혁사상 집대성
"제사는 안 지내도 좋으니 세상이 내 책 읽어주게 하라" 유배 후 정계 복귀 무산
사후 102년 지난 1938년에야 문집 '여유당전서' 출간
개혁과 신문물 무시한 조선… 폭정에 봉기한 농민들
1895년 육군사령부 공격, 강진 병영성은 폐허로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호남 육군사령부 강진

전라남도 강진은 탐진이라고 했다. 제주도로 가려면 으레 강진나루를 통했으니 탐라(耽羅)의 탐(耽), 나루터의 진(津) 자를 써서 탐진이다. 멀고 험한 섬, 원악도(遠惡島) 제주로 유배당한 이들은 대개 탐진을 거쳐 갔다. 중국, 일본과 무역을 할 때도 강진에서 배가 오갔다. 탐진강 따라 뭍으로 물자와 사람이 오갔다.

1417년 전라 육군 총사령부인 전라병영이 강진에 설치됐다. 성벽을 둘러 웅덩이를 파고, 웅덩이 바깥에는 깊이 2m가 넘는 함정을 파고 죽창을 곳곳에 박아 넣은, 요새였다. 강진은 무역과 상업 중심지로 변했다.

그런데 1784년 전라병영에서 이임한 전 병사 조학신이 조정에 이리 보고한다. "강진 병영은 평야에 있고 몹시 좁아 방어용으로 큰 흠이다." 이에 비변사는 "당초 설치할 때 뜻이 있었을 것이니 (중략) 우선은 덮어 두는 것이 좋겠다"라고 건의했다. 정조는 그리하였다.('비변사등록', 정조 8년 1784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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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강진은 조선 남도 총사령부, 전라 병영이 있던 곳이다. 병영성은 동학농민혁명 때 농민들에 의해 불탔다. 그 강진에서 고려청자가 탄생했고, 네덜란드 선원 헨드릭 하멜 일행이 거지처럼 살았고, 젊은 정치가 정약용이 유배당했다. 이들은 완벽하게 무시당했다가 20세기에야 처음 발견한 것처럼 부활했다. /박종인 기자

그 무렵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이렇게 글을 썼다. "무엇 때문에 강진 평야에 병영을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 병영성은 아침에 포위되면 저녁에 함락되는 것을 면치 못하고(朝圍夕拔在所不免), 한 번 급한 경계가 있으면 놀란 물고기나 짐승처럼 뿔뿔이 도망칠 것(一有警急魚駭獸竄)이니 옆에 산성을 쌓아야 한다."('여유당전서' 시문집 9권 '수인산(修因山) 축성(築城)에 대한 의')

정약용이 죽고 59년이 지났다. 1895년 양력 1월 5일 토요일 아침, 동학농민혁명군이 강진 병영성을 함락시켰다. 정약용이 우려한 그대로, 관군은 물고기나 짐승처럼 도망갔다. 농민군이 아침을 먹고 출정해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에 병영을 접수했으니, '아침에 포위되면 저녁에 함락된다'는 예언보다 반나절이 빨랐다.

왜 농민들이 조선 육군사령부를 공격했고, 사령부는 무기력하게 불에 탔는가.

강진의 거지, 헨드릭 하멜

1656년 3월 네덜란드 사람 헨드릭 하멜과 동료 11명이 강진 병영에 도착했다. 3년 전 제주도에 난파한 동인도회사 소속 네덜란드 상선 스페르웨르호 선원들이다. 이들은 목적지인 일본 나가사키로 가려 했으나 조선 정부는 이들을 억류했다. 대서양과 인도양과 태평양을 건넌 항해술과 선진 문물을 가진 자들이었다. '하멜표류기'에 따르면 조선정부와 고관대작들은 이들을 광대로 취급했다. 서울에서 강진, 순천, 여수로 분산 수용된, 유럽 최강 해양국가 네덜란드에서 온 최고급 인력들은 땔감을 줍고 양반집에서 춤을 추고 풀을 뜯고 절에서 옷을 얻어 살다가 13년 20일 만에 일본으로 탈출했다. 구걸이 실패하면 병영 마을 돌담을 쌓고 논에 댈 물길을 만들며 생계를 꾸렸다. 탈출한 하멜은 그 기간 못 받은 봉급을 청구하기 위해 보고서를 썼다. 이게 '하멜 표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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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일행이 쌓기 시작한 ‘하멜식 담쌓기’. 강진 병영 마을 돌담이다. 하멜 일행은 돌담을 수선하고 땔감을 구하고 춤을 추고 구걸을 해서 빌어먹는 거렁뱅이 생활을 했다.

강진에서 사라진 미래, 정약용

하멜이 도주하고 138년이 지났다. 1801년 양력 12월 정약용이 강진으로 들어왔다. 정조의 총애를 받는 신진 관료였다. 정조가 죽자마자 노론과 정쟁에 밀려 금기사항인 천주교도라는 누명으로 강진까지 유배당한 사내였다. 만 8년 관료 생활에 만족할 수 없는 혁신 정치가였다. 정계에 복귀하는 날을 꿈꾸며 그가 써내려간 혁신 철학이 훗날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응집됐다. 1표2서, 즉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세유표'가 그가 강진시대에 완성한 정치철학이다. 남인(南人)을 중심으로 일어난 실학사상이 그에게 모두 모여 거대한 개혁론으로 완성됐다.

강진 갑부 해남 윤씨 윤광택 집안은 정약용의 먼 외가요 사돈집이었다. 이들 도움으로 정약용은 강진 다산(茶山)에 집필실과 살림집을 꾸미고 제자들과 함께 집필에 몰두했다. 방대한 종이와 방대한 자료 수집은 이들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훗날 1957년 해남 윤씨 문중은 정약용이 살던 집을 복원하고 추사 김정희 글씨를 모아 다산초당 현판을 붙였다. 초가집이었으나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해 기와를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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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생활했던 다산초당. 1957년 해남 윤씨 문중이 ‘튼튼하게 보존되도록’ 기와를 얹었다.

강진 유배 첫해 정약용은 아들들에게 이렇게 글을 썼다. "내 책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면 사헌부의 계문과 옥안만 믿고 나를 평가할 것이 아니냐.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취급받겠느냐?"('여유당전서' 1집, '두 아들에게 부친다') 유배는 생각보다 길었다. 7년째인 1808년 여름, 조바심이 비친다. "내가 죽은 뒤에 아무리 제사를 지내준다 하여도, 내 책 한 편을 읽어주는 일보다는 못하게 여길 것이니, 기억해 두어라."(다산시문집 18권, '두 아들에게 주는 가계') 그 해 가을, 또 편지를 쓴다. "나의 책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아버지나 형제로 맺는 것도 좋을 것이다."

1818년 유배가 풀렸다. 포항 열 달을 포함해 18년을 끌었다. 신진 정치가 정약용은 두 번 다시 정계에 복귀하지 못했다. 대신 500권이 넘는 저작이 생산됐다. 정약용 생전에 이 저작물은 그 어디에서도 출판되지 못했다. 1836년 정약용이 죽었다. 1894년 고부에서 군수 조병갑이 벌인 폭정에 농민들이 죽창을 들었다. 이듬해 1월 5일 장흥 농민군이 강진 병영성을 함락시켰다. 폐허만 남은 병영은 그 해 폐지됐다. 그가 전방위로 기획한 국가 정책은 책 속에만 남았다.

일본인이 알아본 고려청자

1913년 강진군 대구면에서 스에마쓰 다미히코(末松多美彦)라는 일본인이 파란색 사금파리를 주웠다. 구 대한제국 황실 주사였던 스에마쓰는 강진에 있는 고종비 엄씨 토지 관리인이었다.이듬해 이왕직박물관 직원인 형 스에마쓰 구마히코(末松熊彦)가 내려와 100군데가 넘는 도요지를 찾아냈다. 일본인들 사이에 고려청자 광풍이 불던 때였다. 미치광이 두목은 4년 전 안중근에 의해 처단된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토는 곤도(近藤)라는 일본인 골동품상에 들러 가게에 있는 청자를 전부 사간 적도 있었다. "개성 왕릉군에는 모든 산과 언덕이 벌집처럼 구멍이 나 있을 정도로"(아라이 신이치, '약탈문화재는 누구의 것인가') 모두가 미쳤다.

고려청자 장인 이용희. 1964년 그의 집 마당에서 기록에만 있던 고려 의종 ‘청자 기와’가 나왔다.
고려청자 장인 이용희. 1964년 그의 집 마당에서 기록에만 있던 고려 의종 ‘청자 기와’가 나왔다.

조선인은 가치를 몰랐다. 돈을 바라며 직접 도굴에 뛰어든 이도 있었고 소쿠리에 청자 파편을 가득 담아 막걸리 값과 바꿔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조선인이 왔기에 가지고 있던 청자를 보여줬더니 '이것은 도대체 어디 것인가'하며 진귀하게 여기기에, 개성에서 출토된 고려 시대 것이라 설명하니 놀랄 정도의 상황이었다."(미야케 조사쿠(三宅長策), 1934, '그 당시의 추억-고려고분발굴시대' 중 '도굴꾼 다카하시의 회고') 이 말인즉슨, 그 어느 조선인도 고려청자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이다. '고려비색 천하명품' 따위 언급은 그 이후 나온 얘기다. 개국에서 멸망 때까지 조선 정부는 도공들에게 백자 제작을 강요하고 여타 그릇 제작을 금했으니, 세상이 청자를 알 턱 없었다. 그 도요지가 강진에서 200군데 넘게 나왔다. 일본인들이 발굴했다.

해방이 되었다. 1963년 입대를 앞둔 청년 이용희(79)의 집에 국립박물관 연구원인 최순우와 정양모가 찾아왔다. 청자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이용희가 청자 기와 조각을 보여줬다. "우리 마당에서 주웠다." 이듬해 집을 찾은 발굴단에게 이용희가 말했다. "우리 집 마당에 비가 와도 물이 금방 빠지는 곳이 있다." 바로 그곳을 삽으로 찌르자 첫 삽에 온전한 청기와 하나가 튀어나왔다. 사치의 극을 달린 고려 18대 의종이 청자로 지붕을 인(蓋以靑瓷)' 양이정(養貽亭) 청기와가 나온 것이다.('고려사절요' 의종 11년 4월) 해방 후 조선인에 의해 발굴된 첫 청자였다. 군 제대 후 1968년 이용희는 집 근처 논에서 청자 가마터를 찾아냈다. 역시 한국인이 발굴한 첫 청자 가마터다. 가마터 주변은 군립청자박물관이 되었다.

허무하게 사라진 보석들

강진 도요지가 발견되고 24년 뒤 정약용의 문집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가 간행됐다. 생전에 간헐적으로 필사본만 돌아다니던 저서들이 묶여서 나왔다. 정약용 본인 또한 "'목민심서'가 한 글자 반 구절도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선 안 되니, 헤아려 달라"(노론 학자 이재의에게 보낸 편지)고 당부한 무서운 책이었다.

1936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조직인 신간회가 해소됐다. 이후 학자인 연희전문 교수 정인보와 언론인인 전 조선일보 사장 안재홍이 주동해 '조선학운동'을 개창했다. 전통사상에서 개혁을 찾자는 취지였다.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성리학을 버리고 취한 대안이 양명학과 다산학(茶山學)이었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까 두려웠던, 그럼에도 책이 읽혀서 자신이 해를 입을까 두려웠던 저작들이, 그가 죽고 백년이 지난 뒤에야 되살아난 것이다.

1934년 '하멜 표류기' 국역본이 사학자 이병도에 의해 나왔다. 300년 전 하멜이 겪은 거지 같은 일에 사람들은 놀랐다. 첨단 항해술, 무기술과 경험이 한꺼번에 들어왔다가 사라진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병영마을에는 그들이 쌓은 담벼락과 수로(水路)가 남아 있다. 거지 취급 하지 않았더라면 그들로부터 전수받았을지도 모를 네덜란드식 대포 복제품 하나가 기념관에 앉아 있다. 기념관 앞에는 이글거리는 농민들 노여움 속에 사라진 전라병영성이 지금 복원 중이다.

아무도 몰랐던 고려청자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가 되었다. 이후 이용희는 도공이 되었다. 지금 이용희는 전남 무형문화재 제26호 청자장이다. 청자 장인 이용희 작업실 동흔요는 지난겨울 언덕 뒤로 이전했다. 한국인 손으로 청기와를 파냈던 집과 마당은 철거될 예정이다. 취락구조개선사업 대상에 포함됐다는 것이다. 주변 민가는 철거가 완료됐다.

당대 세계 최고의 기술과 지식, 지혜가 강진에 모여들었다가 사라져버렸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어야 할 흔적들이, 초라하다.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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