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면세점 차별은 국가 몰락의 징후?”…거세지는 中의 '샤프'파워

    입력 : 2018.02.13 15:33 | 수정 : 2018.02.13 15:35

    “매우 수치스럽다. 영국 몰락의 징후다.”

    중국 관영언론 환구시보의 후시진(胡锡进·사진) 편집장은 지난 12일 난데 없이 영국을 맹비난하는 글을 트위터에 남겼다. 환구시보는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로, 사드 배치 논란 당시 한국을 향해 “김치만 먹어서 멍청해졌나”고 맹비난했던 중화주의 성향 신문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도 즐겨본다는 이 신문의 총책임자인 후 편집장은 이번엔 도대체 어떤 사건을 두고 ‘영국 몰락’이라는 진단을 내렸던 것일까.

    ◇ 英 면세점 상점 가격 정책에도 ‘발끈’

    발단은 영국 런던 히스로 공항 내 한 면세점이 중국행 승객의 할인 쿠폰 제공 조건을 상향 조정하면서부터다. 이 면세점은 250파운드 이상 구매한 고객에게 20% 할인 쿠폰을 주곤 했는데, 춘절 연휴를 앞두고 중국행 승객에게는 할인 쿠폰 혜택 조건을 1000파운드로 올린 게 화근이었다.

    이에 한 블로거가 할인 조건 등 부정확한 정보에 기반해 쓴 글을 올려 웨이보 등 소셜미디어가 시끌벅적해졌다. 후 편집장은 여기에 편승해 대중의 분노를 부채질한 것이었다.

    중국 소셜미디어 웨이보에 영국 면세점의 가격 정책을 문제 삼는 글이 게재돼 큰 논란이 일었다./웨이보
    환구시보는 이 문제를 사설로도 다루면서 12일자에 “이번 사건은 중국인들의 대(對)영국 여론에 매우 큰 영향을 줬다”며 “중국인들은 지금 ‘영국인들이 크나큰 빈곤에 빠져서 이렇게 자존심을 버리고 있나’라는 생각을 품고 있다”고 주장했다. 후 편집장은 이 사건이 “영국은 물론 유럽 전체의 이미지를 깎아내렸다”고도 하는 등 다소 황당한 주장도 내놨다.

    면세점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히스로 공항의 가격 정책은 고객 입장에서 시정 조치가 필요한 이례적 사안으로 여겨졌다. 이날 영국 공항 측 역시 즉각 사과문을 게재하고 시정 조치를 내렸다.

    ◇ 무인양품·자라·델타항공·몽클레어 등 글로벌 기업 줄줄이 뭇매

    자국의 주권이나 이익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자국의 주장을 관철하려 노골적인 협박과 황당한 주장을 쏟아내면 얘기가 달라진다. 또 논쟁의 여지가 있거나 사소한 사안에 대해서도 “중국인의 ‘감정’을 건드렸다”는 이유만으로 불필요하게 갈등을 키우는 것도 문제다.

    벤츠는 달라이라마의 문구를 인용한 게시물을 올렸다가 중국인들의 뭇매를 맞았다. /인스타그램
    이달 초엔 독일 자동차 업체 메르세데스벤츠가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어구(語句)를 인용했다가 중국에서 뭇매를 맞았다. 당시 메르세데스-벤츠의 소셜 미디어 담당자가 인스타그램에 흰색 메르세데스 쿠페 사진과 함께 ‘모든 각도에서 상황을 바라보면 더 개방적이게 된다’는 말을 게재했던 게 갈등의 시발점이었다. 인스타그램은 중국에서 접속이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해당 캡처 파일이 중국 인터넷 공간에서 삽시간에 퍼졌다.

    ‘달라이 라마를 인용한 게 기분 나쁘다’는 중국 네티즌들의 항의가 빗발쳤던 가운데, 당시 인민일보는 이 포스팅을 두고 ‘벤츠가 인민의 적(敵)’이라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인민일보는 사설에서 “벤츠가 매우 악한 의도를 갖고 있다”며 “이것은 단순히 공격을 넘어서 중국 인민을 향한 도전이자 혐오”라고도 주장했다.

    대만 표기법을 둘러싼 문제는 갈등을 부추기는 단골 사례다. 올 들어서만 메리어트 호텔, 델타 항공, 자라, 몽클레어 등이 중국 네티즌과 언론의 뭇매를 맞았다.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 중 대만 선수단 입장 당시 국내 방송사들이 송출한 국적 표기 자막을 두고서도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한글 자막을 ‘차이니스 타이베이’ 대신 ‘대만’이라고 적었다는 이유에서다.

    중국 인민일보는 매리어트호텔의 지도를 문제 삼아 서둘러 표기를 바꾸라고 압박했다./트위터
    중국 정부가 여론전에 직접 뛰어드는 사례도 적지 않다. 지난달 말엔 일본 생활용품 업체 무인양품이 배포한 지도에 일본과 영유권 분쟁 중인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가 누락됐다며 지도 폐기를 명령했던 게 대표적이다. 이에 일본 정부가 반박하며 설전이 벌어지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 교묘하게 상대국에 압박 가하는 ‘샤프 파워’

    중국의 이런 행태에 대해 작년 말 ‘미국 민주주의를 위한 기금’은 권위주의 국가들이 협박과 교묘한 여론·정보 조작을 하는 ‘샤프(sharp) 파워’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했다. 문화를 매개로 설득과 공감을 유도하는 ‘소프트 파워’, 혹은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하드 파워’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샤프 파워’는 회유와 협박, 교묘한 여론 조작 등을 통해 상대국의 정치·정보 환경에 영향을 미쳐 적대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게 핵심이다. 중국과 러시아 같은 권위주의 국가가 내부의 정치적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조직적으로 억압하는 데 성공했던 파워를 이제 국제사회에도 표출한다는 취지다.

    예를 들어, 환구시보는 사드 배치를 둘러싼 논란이 불거졌던 당시 ‘사드 배치 완료 순간, 한국은 북핵 위기와 강대국 간 소용돌이에서 개구리밥이 될 것’, ‘사드 배치를 지지하는 보수주의자들은 김치만 먹고 멍청해진 것 아니냐’는 등 자극적인 표현을 연일 쏟아냈었다. 구체적인 근거가 없었음에도 이로 인해 ‘사드 찬성’ 여론이 중국의 의도대로 흩트려졌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물론, 중국의 경제 보복 문제가 해결되는 데도 걸림돌이 됐다는 비판도 나온다.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샤프 파워’의 위협이 거듭되면 대상자가 스스로 민감한 주제를 피하는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공개(openness)와 투명성이 최고 자산인 민주국가들은 중국의 ‘샤프 파워’ 사례를 적극적으로 노출해야 한다”고 했다.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