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개막 때 물결친 메밀밭… "쓰러져도 일어서는 한민족 닮았죠"

조선일보
  • 변희원 기자
    입력 2018.02.12 03:03

    2018 평창 올림픽 개회식서 화제
    미디어 아티스트 목진요 감독… 백두대간·메밀꽃밭·빛기둥 연출
    "'강한 한국' 보여주고 싶었어요"

    소금을 뿌린 듯 하얀 메밀꽃밭 위로 정선아리랑이 구슬피 흘렀다. 소리꾼 김남기(77)가 무대 한가운데에 서 있고, 메밀꽃밭을 물길 삼아 아이들을 태운 뗏목이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뗏목이 지나온 길로 '시간의 강'이 흐르고, 하얀 꽃들은 반딧불이 되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11일 서울 망원동 작업실에서 목진요 감독이 자신의 작업모를 들고 웃었다.
    11일 서울 망원동 작업실에서 목진요 감독이 자신의 작업모를 들고 웃었다. 목 감독은“개회식에 대한 호평이 많이 나오지만, 나한텐 아쉬운 것 투성이다”고 했다. /남강호 기자
    시청률 조사기관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9일 열린 평창올림픽 개회식에서 '아리랑: 시간의 강'이 펼쳐진 순간에 가장 높은 28.5%의 시청률(KBS 기준)을 기록했다. 메밀꽃밭을 연출한 것은 프로젝션 매핑을 담당한 목진요(49) 감독. 11일 서울 망원동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바람에 눕고, 비를 맞아 꺾이고, 짓밟혀 이지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메밀꽃 송이송이가 한국인을 상징한다"며 "전쟁을 겪은 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내느라 희생한 우리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를 떠올릴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메밀밭에 웬 노을?'이란 반응도 있었어요. 이제 세상을 떠났거나 노년을 맞은 그들을 황혼으로 표현한다고 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입니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그들의 수고가 결국 개막식을 빛낸 반딧불로 이어진 거죠."

    홍익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미디어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그는 연세대 디자인예술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매핑(mapping)은 프로젝션을 바닥이나 물체에 쏘아서 색이나 문양을 입히는 작업. 목 감독은 "한정된 예산 때문에 큰 설치물이나 많은 인력을 동원할 수 없는 이번 개막식에선 매핑에 기대야 할 부분이 많았다"고 했다.

    메밀밭뿐 아니다. 개회식 카운트다운 장면부터 장구춤으로 연출한 태극, 백호가 누볐던 백두대간, 선수 입장 때 바닥을 수놓은 한글, 하늘을 향해 높이 치솟았던 '빛 기둥' 등을 그가 연출했다. 개막식 후반에 나왔던 이 기둥은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통로처럼 보일 만큼 강렬했다. 길이 35m의 와이어 58개를 세워 지름 24m 원통을 만들었다. 한 줄마다 80개씩, 총 4640개의 LED 전등이 달렸다. 개회식 때는 군인들을 동원해 와이어를 달았다. 목 감독은 "조마조마했다. 하늘로 곧게 치솟으며 크고 희망찬 미래를 상징해야 하는데 강풍이라도 불면 불안하게 흔들리는 미래가 될 수도 있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이들을 실은 뗏목이 메밀꽃밭을 물길 삼아 흘러가는 모습.
    아이들을 실은 뗏목이 메밀꽃밭을 물길 삼아 흘러가는 모습. 목진요 감독이 연출한‘아리랑: 시간의 강’의 한 장면이다. /뉴시스
    그가 개회식에서 가장 보여주고 싶었던 건 '강한 한국'이다. 그는 "우리는 스스로를 부드럽게 표현해왔지만, 그 이미지를 바꿔 대한민국의 힘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했다. 그가 제시한 강력한 힘은 장구춤에서 등장한 '태극'이다. 장구춤 추던 무용수들이 옷을 한 겹 벗어던지면서 빨갛고 파란 옷으로 목 감독이 그려놓은 태극 문양을 완성시킬 때 객석에서 환호가 쏟아졌다. 목 감독은 "이리 치이고 저리 휘어 이지러지는 곡선이 아니라 완전무결한 형태의 원으로 이뤄진 태극이다. 그게 우리의 옹골찬 힘이자 무한 동력의 엔진이다"고 했다.

    목 감독에게 평창올림픽 개·폐회식은 첫 관제(官制) 행사다. 2년에 걸쳐 준비했지만, 첫해는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대다" 흘려보낸 것이다 다름없다. 평창올림픽이 최순실 국정 농단과 연관 있다는 의혹이 나오면서 따가운 눈총을 받았고, 정권이 교체되면서 여러 풍파를 겪었다. 개회식 준비를 제대로 시작한 건 불과 1년 전. 목 감독은 "다양한 장르의 전문가들이 모였던 자리였다. 대중문화와 순수예술을 하던 사람들 간의 의견 차이를 좁히는 게 관건이었다. 술을 마시면 '청수(淸水·순수예술)와 탁수(濁水·대중문화)가 모여 결국 장강(長江)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며 서로 다독였다"고 했다. "저는 청수에서 놀았는데 이제 좀 탁해진 것 같아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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