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같은 땅에서 서로 입장 너무 달라… 그런 삶이 가능한 現實 신기해"

조선일보
  •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18.02.12 03:03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 조형물을 불태우는… 조선족 화가 최헌기]

    자유 세상의 더 많은 걸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게
    돌아간 뒤 추억이 되도록… '보수'다운 포용력 보여야

    "北 응원단은 자기 마음대로 웃고 우는 감정 표현 못 해
    하고 싶은 말도 못 한다…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들"

    평창 동계올림픽에 맞춰 강릉 경포해수욕장에는 국내외 미술 작가들이 조형물을 세운 뒤 불태우는 축제가 열리고 있다. 이 중에는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의 입상(立像) 위로 마른 나무 뿌리들이 어지럽게 놓인 조형물이 있다. 제목은 '위대한 광초(狂草)'. 자유 대한민국 땅에 공산주의 3대 거두(巨頭)를 세웠다는 것은 인상적이다.

    중국 현대미술 작가인 최헌기(56)씨의 작품이다. 그는 조선족이다. 2016년 중국 항저우(杭州) G20 정상회담과 2017년 샤먼(厦門) 브릭스(Brics) 정상회담에도 그의 작품이 초대됐던 인물이다.

    최헌기씨는“다른 나라 국기를 들고서 자기 소신(所信)을 드러내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헌기씨는“다른 나라 국기를 들고서 자기 소신(所信)을 드러내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말했다. /강릉 경포해수욕장=최보식 기자
    ―왜 평창 문화올림픽에서 마르크스·마오쩌둥 등을 불태우려 하는가?

    "이들은 공산주의 대표들이고, 내가 나서 자랐던 세상이고 내 과거 모습이다. 나를 태우는 게 좋겠다. 이런 행위로 나름대로 평창올림픽에서 내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그 속에서 살아온 공산주의 이념과 체제는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쳐왔는가?

    "어떤 이념에 갇히면 예술을 할 수가 없다. 중국인은 두 가지 방식의 삶을 산다. 체제 내에 살거나 체제 바깥에서 살거나. 예술가는 후자 쪽이다. 체제 바깥 세상을 얘기한다. 나는 세상을 벗어나 꿈을 꾸려고 한다. 정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예술가는 그런 힘이 없다.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가리킬 수 있을 뿐이다."

    ―당신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지만 국적으로는 중국인인데?

    "나는 중국인이지만 보통 중국 사람과 다르다. 심장을 두 개 갖고 살아온 사람이다. 경계인으로의 삶을 살았다. 과거에는 이를 슬프게 생각했다. 이제는 내가 심장을 두 개 가졌으니 부유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심장을 두 개 가진 사람에게 평창올림픽은 어떻게 보이는가?

    "하계·동계올림픽, 월드컵, 국제육상경기대회를 모두 개최한 나라는 세계에서 다섯 나라이고, 아시아에서는 일본밖에 없다고 들었다. 열심히 살아가는 한국인이 자랑스럽지만 한편 안타깝기도 하다. 그 안타까움은 내부 갈등이다. 같은 땅에 살면서 입장이 서로 너무 다르다. 그런 삶이 가능하다는 현실이 신기하다.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다."

    ―공산당 일당 체제에 중앙통제적 사회에서 살아온 입장에서는 그렇게 비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자유(自由)라고 하지만 이해 못 할 게 있었다. 제일 이상하게 보이는 광경은 태극기 집회에서 성조기를 같이 흔드는 것이다. 세상 어디서도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다른 나라 국기를 들고서 자기 소신(所信)을 드러내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중국인 동료 작가들이 '한국이란 나라는 미국의 무엇인가'라며 흉을 볼 때 나는 답변할 수 없었다."

    ―6·25를 겪은 한국인에게 한·미 동맹의 의미는 특별하다. 보수 단체에서 성조기도 함께 흔드는 것은 김정은의 대남 유화전술이 한·미 동맹을 균열시킬 수 없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체험을 못 했고 그것까지 이해하지 못한다. 한국 역사도 모르는데 내가 무슨 얘기를 하겠나. 그냥 직감으로 말하면, 북한에서 내려온 손님을 향해 대놓고 그렇게 시위를 하는 것은 좀 옹졸해 보였다."

    ―현 정권의 대북 정책이나 김정은 정권을 상전(上典) 모시듯 비굴한 자세로 대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차원도 없지 않을 것이다.

    "피가 같이 흐르는 형제인데 너무 잘게 따지고 포옹을 못 하면 미래가 없게 된다. 사람에 비유하면 북한은 병(病)에 걸린 사람이다. 건강한 사람이 아픈 사람을 안아줄 수밖에 없다."

    ―북한 선수와 대표단, 공연단, 응원단을 향해 표출해서는 안 된다는 데 동감이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호의와 친절을 보여주는 것이 보수다운 포용력이라고 본다. 이들이 자유 세상의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게 하고, 돌아간 뒤에 추억이 되도록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창올림픽에 와서 시합 한번 못 보고 90년대식 공연만 하고 돌아간 공연단을 보면 마음이 짠해진다.

    "불쌍한 사람들이다. 공연단이나 응원단의 미모만 봐서는 안 된다. 이들은 자기 마음이 가는 대로 웃고 우는 감정 표현을 못 한다. 하고 싶은 말을 못 한다. 여기에 내려와 잘못 웃고 말하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는지 안다. 아마 이들은 오기 싫었을 거다. 이들이 한국에서 좋은 인상을 갖고 북한에 돌아가 좋은 얘기를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북한에 가본 적이 있나?

    "없다."

    ―중국에는 북한 관광 상품도 있다. 궁금하지 않은가?

    "내가 바쁘기도 했지만 북한에 대해 호기심이 없다. 북한의 상황이 어떤지 그 속의 주민들이 무얼 생각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그 시대를 거쳐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겪은 문화대혁명(1966~1976년·마오쩌둥에 의해 주도된 극좌 사회주의운동) 시기의 얘기를 탈북자들은 그대로 하고 있다. 이들이 왜 북한을 도망쳐 나오는지 우리는 너무 잘 이해하고 있다. 그 세상을 벗어나고 싶지만 갈 데가 없고, 그나마 익숙하고 믿을 만한 나라가 한국이다."

    북한 응원단 모습.
    북한 응원단 모습. /김지호 기자
    ―문화대혁명은 당신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나?

    "내 유년과 소학교 시절에 그런 광풍이 불었다. 담벼락에 글(대자보)을 붙여놓았고 청년들은 깃발 들고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학교에서는 공자(孔子)를 욕했고… 그런 풍경은 모두가 뭔가에 홀린 것처럼 보였다. 현실 속 어른들에게는 고난과 속박의 시간이었겠지만 철 모르는 아이의 눈에는 너무 재미있었다."

    그는 백두산 자락에 있는 지린성(吉林省) 안투현 출신이다. 조부 때 옮겨와 살았다. 고향은 전북 남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족으로 중국 인민해방군에 입대했다. 항일전쟁과 국공(國共)전쟁에서 싸웠다.

    "아버지는 6·25 전쟁에도 포병(砲兵)으로 참전했다. 김일성이 군사 지원을 요청하자 마오쩌둥은 인민해방군 소속 조선족 청년들을 선물로 내줬다. 이들을 북한군에 편입시킨 것이다."

    ―아버지가 6·25 당시 북한군의 일원으로 남침해왔다는 뜻인가?

    "아버지는 그때까지 미 제국주의 군대의 침략에 맞서 남조선을 해방시키는 전쟁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본 것은 숨져 있는 한국인 동포들이었다. 그때에야 잘못 참전했다는 걸 느꼈다. 아버지는 다리에 부상을 입었고 전쟁이 끝난 뒤 돌아왔다. 중국 정부에서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해 원하는 바를 물었다. 아버지는 '장가를 가고 싶고 라디오도 달라'고 했다. 마을에서 신붓감 공고를 하자 열 살 아래 처녀가 나섰다. 공산주의였으니까 결혼도 그런 식으로 했다. 결혼 뒤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과 떨어져 산속에서 양봉을 하며 살았다. 아버지는 '내가 죄인이다. 내가 쏜 대포에 내 가족, 내 친척을 죽였지 않나'라며 심적 고통이 대단했다."

    ―라디오는 왜 원했나?

    "아버지는 라디오를 들으며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남쪽 고향으로 오고 싶어 했던 것 같다. 2000년에 돌아가셨다."

    ―그런 산골 오지에서 당신은 어떻게 화가가 될 수 있었나?

    "산속에서 자라다가 소학교에 갈 나이가 돼 마을로 내려왔다. 적응을 못 했다. 혼자서 그림책을 보는 시간이 많았고 그걸 보고 따라 그리곤 했다. 우연히 선생님이 내 그림을 보고는 칭찬했다. 그림 재능이 소문났다. 문화대혁명으로 대학교수 자리에서 쫓겨나 하방돼온 조선족 화가가 있었다. 그분이 인체 해부도(解剖圖)라고 할까, 골격과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내게 가르쳤다. 러시아식 미술 교육인데 그걸 배우면 사람의 순간적인 동작과 표정을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는 1982년 옌볜대학 미술학과에 들어갔다. 재학생으로 옌볜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당연히 대학교수 자원으로 선발될 줄 알았다. 그러나 졸업 후 고향인 안투현의 중학교 선생으로 발령이 났다. 상부에서 정하면 그게 한 사람의 평생 직업이 되고 그 삶을 결정했다. 3년 뒤 결혼을 한 뒤에야 도시로 나올 수 있다. 그는 옌지(延吉)시의 군중예술관 미술보도원(감독)이 됐다. 하지만 대학교수가 된 친구들에 대한 열등감이 깊었다.

    "그 시절 예술에 대한 순수한 마음보다 울분과 야심(野心), 욕망에 휩싸였다. 주어진 상황에 순응할 수 없었다. 공무원 신분이었지만 나는 인테리어 업체를 운영했다. 나이트클럽과 마사지숍도 열어 돈을 엄청나게 벌었다. 그 뒤 베이징중앙미술학원 조교반(대학원 석사 과정)에 들어갔다. 졸업 전시회에서는 3점씩 출품하는데, 교수가 지목해 내 작품은 14점 전시됐다. 그 직후 중국미술관에서 초대전을 열었다. 젊은 나이에 중국 매스컴의 각광을 받았다."

    ―서울에 처음 온 것은?

    "베이징에 유학 왔던 한 서울대 교수가 1997년 결혼한다고 청첩장을 보내와 갔다. 하지만 공항 검색에 걸려 두 시간 동안 개별 심문을 받았다. 빡빡머리에 귀걸이를 달았고 수중에는 달러도 많았으니 수상하게 본 것이다. 악몽 같았다. 바로 그날이 한국에서는 IMF가 터진 날이었다. 일주일 체류 동안 술만 마시고 그냥 돌아갔다."

    2002년 광주비엔날레가 한국과의 인연을 다시 만들어줬다. 재외동포 예술가로서 초대를 받았다. 전시장에서 초대 중국대사를 지낸 권병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이 '무엇을 도와줬으면 좋겠느냐?'라고 물었을 때 '한국을 알고 싶다. 2년만 살고 싶다'라고 답변했다. 그는 홍익대에서 2년간 연수했다. 2015년에는 성곡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했다. 요즘 그는 중국 현대미술 작가 9명과 함께 강원도 양양군에 임야를 공동 구매해 '중국 예술인 마을'을 조성하고 있는 중이다.

    ―한국에서 살아보니 어떤가?

    "처음에는 '민주(民主)'라는 단어를 잘 몰랐다. 너무 생소하고 이상했다. 시간이 가면서 민주가 한국을 진보시키고 선진국가로 이끌고 있다는 것은 알게 됐다. 하지만 같은 땅에서 서로 너무나 다른 입장이 공존한다는 것은 여전히 신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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