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꼬 튼 남북정상회담…‘비핵화’ 딜레마에 빠진 文대통령

입력 2018.02.11 16:33 | 수정 2018.02.11 17:47

‘북핵’ 의제 빠진 정상회담은 ‘핵 있는 평화’ 용인하는 격
靑 관계자 “문 대통령, 北 대표단과의 2시간 40분 넘은 접견서 ‘비핵화’ 언급 안 해”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청와대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에게서 김정은의 친서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평양 초청장’을 보내면서 남북 정상회담의 물꼬가 트였다. 하지만 ‘한반도 비핵화’라는 목표를 배제한 채 남북정상회담을 진행할 경우, 북한이 추구하는 ‘핵 있는 평화’를 용인해주는 셈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정은의 특사 자격으로 방남한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은 10일 청와대에서 김정은의 친서와 함께 “빠른 시일 안에 만날 용의가 있다”는 초청 의사를 문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앞으로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켜 나가자”고 답했다. 문 대통령의 발언은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싶지만, 아직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취임사에서도 “여건이 조성되면 평양에도 가겠다”고 했다. 지난달 10일 가진 신년기자회견에서도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에 대해 “남북정상회담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야 하고, 어느 정도 성과가 담보돼야 할 수 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이 말한 ‘여건’…‘북핵 문제’로 귀결

문 대통령이 재차 언급하고 있는 ‘여건’이란 무엇일까. 청와대 관계자는 “10년만의 남북 정상회담이 남북관계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의미 있게 이뤄지려면 한반도를 둘러싼 환경과 분위기, 여건이 무르익어야 한다는 생각이 담겨있다”고 설명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환경과 분위기는 결국 북핵 문제로 귀결된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7월 발표한 ‘베를린 구상’에서 “한반도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도전은 북핵 문제”라며 “북한은 핵과 미사일 도발을 계속하며 한반도와 동북아,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한반도 비핵화는 국제사회의 일치된 요구이자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절대 조건”이라며 “북한이 핵 도발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더욱 강한 제재와 압박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북한은 “핵은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며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김정은은 올해 신년사에서 “국가 핵무력 완성의 역사적 대업을 성취했다”면서 “전체 인민이 장구한 세월 허리띠를 조이며 바라던 평화수호의 강력한 보검을 틀어쥐었다”고 했다. 김정은이 핵무력 완성을 공언한 가운데, 이를 뒤집을 가능성은 적을 것으로 보인다.

이 지점에서 문재인 정부는 딜레마에 빠진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조성된 남북대화 모멘텀을 이어가기 위해 ‘비핵화’ 논의를 수면 밑으로 내릴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실제로 문 대통령은 10일 청와대에서 2시간 40분 넘게 진행된 김여정 등 북한 고위급 대표단과의 접견에서 ‘비핵화’와 관련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청와대 관계자가 전했다.

정치권에선 북핵폐기가 남북정상회담의 전제조건이 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장제원 자유한국당 수석대변인은 “북핵폐기가 전제되지 않는 그 어떠한 회담도 북한의 위장평화공세에 넘어가 북핵 완성의 시간만 벌어주는 이적행위가 된다”면서 “북핵폐기가 전제된 회담이라면 한국당은 적극적으로 협력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9일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남북 단일팀 입장에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뒤로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 한편 미국 펜스 부통령 내외와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앉아서 박수를 치고 있다. /연합뉴스
◇다가오는 한·미 연합훈련, 문재인 정부의 선택지는

김정은이 보낸 평양 초청장은 문 대통령에게 ‘민족이냐, 동맹이냐’를 선택하라는 통고장이기도 하다. 첫 번째 시험무대는 한·미 연합군사훈련이다.

한국과 미국은 애초 2월 말 실시하려던 키리졸브 연습과 독수리 훈련을 평창 동계올림픽·패럴림픽 이후로 연기했다. 군 당국과 미국은 패럴림픽 이후 연합훈련을 계획대로 시작하겠단 방침이지만, 북한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북한 노동신문은 지난 7일 한·미 군사훈련을 ‘정면 도전’으로 규정하며 “재개 시 조선반도 정세는 또다시 엄중한 파국 상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미 군사훈련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지난달 말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한 강연에서 “3월 25일까지 한미 연합군사훈련이 조정된 상황이다. 그 상황, 시간 내에 북미 간 대화가 시작될 수 있도록 진입할 수 있게 견인해나가는 것이 관건”이라고 밝힌 이후, 정부 고위 당국자의 발언에선 여운이 느껴진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5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평창올림픽 이후 한·미 합동 군사훈련이 재개되느냐’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정진석 한국당 의원은 이날 총 8차례에 걸쳐 이 질문을 던졌지만, 이 총리는 “한·미 정상이 올림픽과 관련해 연기하기로 합의한 것”이란 대답을 반복했다.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에 김여정의 방문을 ‘교모한 속임수’라고 평가한 존 볼턴 전 유엔 주재 미국 대사의 인터뷰를 올린 뒤, ‘좋은 지적’이라고 평가했다. /펜스 부통령 트위터 캡처
문 대통령도 9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연기할 단계가 아니다. 군사훈련은 예정대로 진행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 데 대해 “아베 총리의 말씀은 북한의 비핵화가 진전될 때까지 한미 군사훈련을 연기하지 말라는 말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우리의 주권의 문제고, 내정에 관한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남북 대화 모멘텀을 이유로 한·미 군사훈련을 또다시 미룰 경우, 미국 측의 반응은 더욱 냉랭해질 전망이다.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10일 오후 존 볼턴 전 유엔 주재 미국 대사가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김여정의 방남을 “교묘한 속임수(smoke and mirror)”라고 평가한 것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렸다. 펜스 부통령은 볼턴 대사의 인터뷰에 대해 “좋은 지적이다. 미국은 북한의 선전과 가식이 전 세계에 퍼지도록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고 적었다. 펜스 부통령이 트위터를 올린 시간, 청와대에선 문 대통령과 김여정 일행이 접견 중이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